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한국 여성문학사상 가장 오랜 활동을 한 박화성과 폭넓은 스펙트럼의 서사와 상상력을 지닌 박서련 작가가 만나다
창작 기간 60년, 한국 여성문학사상 가장 오랜 활동을 한 박화성과폭넓은 스펙트럼의 서사와 상상력을 지닌 박서련 작가가 만나다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이 데뷔한 지 한 세기가 지났다. ‘소설, 잇다’는 이 시점에서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백 년 시공을 뛰어넘는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의 또 다른 근원과 현재를 보여주고자 기획되었다. 그 여섯 번째 책으로,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오랜 시간 활동해온 여성 작가인 박화성과 장르와 형식을 넘나들며 새로운 서사와 상상력을 선보여온 박서련의 작품을 담은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가 출간되었다. ‘소설, 잇다’는 강경애와 한유주, 나혜석과 백수린의 소설들을 계속 선보일 예정이다.1932년 《동아일보》에 『백화』를 연재하면서 한국 문학사상 최초로 장편소설을 쓴 여성 작가로 기록된 박화성. 그는 데뷔작 「추석전야」를 비롯해 「하수도 공사」, 「홍수전후」 등을 통해 노동자와 민중, 여성 들이 억압받는 부조리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근대 한국문학의 출발점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는(김주연 평론가) 평을 받은 작가다. 선구자적 면모를 지녔지만 당시 문단은 그에게 ‘여류작가’라는 굴레를 씌웠는데 그럼에도 그는 사회적 역사적 약자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으며, 온전히 ‘작가’로 바로서기 위해 많은 한계와 장벽에 맞서 싸웠다.첫 장편 『체공녀 강주룡』으로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전혀 다른 여성 서사”(서영인 평론가)라는 상찬과 함께 등장한 박서련은 역사소설, SF, 판타지, 청소년문학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자신만의 서사를 갱신해왔다. 매년 한 권 이상의 작품을 선보이는 왕성한 기량을 발휘해온 그는 최초의 고공농성 노동자 ‘강주룡’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것을 시작으로, 성폭력 가해자에게 응징을 가하는 청년 여성 ‘수아’(『마르타의 일』), 사랑의 연대를 실천하는 스무 살 ‘설희’(『더 셜리 클럽』), 욕망하는 주체로 구현한 삼국지의 미녀 ‘초선’에(『폐월; 초선전』)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여성 인물들을 선보였다.박화성의 문학은 주로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뉘는데, 이 책에는 해방 전 그가 가장 활발하게 집필하던 시기의 대표 중단편 「하수도 공사」(1932), 「홍수전후」(1934), 「호박」(1937)이 수록되어 있다. 세 편의 소설들은 모두 빈궁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가부장제라는 이중의 고초를 겪는 여성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수도 공사」는 실업구제라는 명목하에 벌인 하수도 공사의 동맹파업을 다룬 작품으로, 노동자 대표 서동권의 애인인 ‘용희’를 통해 계급의식의 각성과 그로 인한 갈등 및 모순을 보여준다. 「홍수전후」에서는 35년 만의 대홍수로 목숨을 잃은 어린 딸 ‘쌀례’를 등장시켜 빈부격차에 비례하는 자연재해의 피해와 농민들의 참상을 드러낸다. 「호박」의 ‘음전’은 대흉년이 들어 시멘트 공장이 있는 객지로 내몰린 약혼자를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전해 온 것은 함께 떠난 약혼자의 형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다.박서련의 소설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는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변주한 작품이다. 인문학 독서 동아리 ‘유독’의 회장인 진은 총여학생회의 재건이라는 포부를 안고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진의 레즈비언 애인인 림도 그를 적극 돕지만 선거 당선을 위해 둘의 관계를 비밀에 부쳐야만 하는 현실에 불만을 느낀다. 일제의 착취에 저항하는 동맹 파업이라는 「하수도 공사」의 “민족적 대의”는 이 소설에서 “총여학생회 재건”이란 화두로 옮겨지는데, 작품의 큰 문제의식은 “여성의 인권과 권리”라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전청림 평론가) 그리고 소설은 박화성의 시대부터 대의명분 아래 배제해온 ‘여성’의 얼굴을, 퀴어를 벽장 속에 가두는 세계의 폭력성 안으로 옮겨 가면서 다시금 또렷이 비춘다. 백 년 전 박화성의 소설에서 거듭 묻고도 거듭 그 대답이 좌절되었던 식민지 청년 여성 용희의 질문은, 이처럼 박서련에게로 건너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재를 관통하는 물음으로 나아가고 있다.
천사가 날 대신해
‘나쁜 피’라 불린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과 여성이 처한 현대의 공포를 그려낸 박민정 작가가 만나다
‘나쁜 피’라 불린 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과여성이 처한 현대의 공포를 그려낸 박민정 작가가 만나다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이 데뷔한 지 한 세기가 지났다. ‘소설, 잇다’는 이 시점에서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백 년 시공을 뛰어넘는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의 또 다른 근원과 현재를 보여주고자 기획되었다. 그 다섯 번째 책으로, 근대 여성 문학의 맨 앞에 놓이는 이름 김명순과 한국 사회의 혐오와 폭력의 역사를 써온 박민정의 작품을 담은 『천사가 날 대신해』가 출간되었다. ‘소설, 잇다’는 박화성과 박서련, 강경애와 한유주, 나혜석과 백수린의 소설들을 계속 선보일 예정이다.한국 최초로 현상문예에 당선된 여성 소설가 김명순은 시인이자 기자, 평론가, 번역가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한 작가였다. 그러나 세상은 ‘첩의 딸’이라는 출신 배경을 문제 삼으며 ‘나쁜 피’가 흐르는 부정한 여성으로 규정하려 했고, 남성이 주류인 문단에서 그의 행보는 ‘학대’에 가까운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봉건적인 가부장제에 대한 환멸은 김명순의 삶과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사랑과 자유에 기반한 연애를 갈망했으며 대등하고 주체적인 관계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와 여성들이 놓인 정치, 젠더, 경제, 역사적 조건을 꾸준하게 탐구해온 소설가”(인아영 평론가)라는 평가를 받은 박민정은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등을 받으며 그 문학적 성취를 꾸준히 인정받아 온 작가다. 첫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에서 IMF 이후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렸던 그는 항공사 승무원의 죽음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고발하고(『미스 플라이트』), 일상 곳곳에 자리 한 성폭력과 성차별의 문제를 치밀한 사유와 입체적 서사로 그려왔다.(『바비의 분위기』)『천사가 날 대신해』에는 김명순의 데뷔작 「의심의 소녀」(1917)와 중편 「돌아다볼 때」(1924), 「외로운 사람들」(1924)이 수록되어 있다. 세 편의 소설은 결혼과 연애, 신여성의 삶, 자전적 글쓰기로 대표되는 김명순 작품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마을에 홀연히 나타난 아리따운 소녀를 둘러싼 추측과 소문을 통해 학대받는 여성의 삶을 묘사하고,(「의심의 소녀」) 기생 출신 소실의 딸을 주인공으로 하여 가부장제의 모순을 고발하기도 하며,(「돌아다볼 때」) 최씨 가문 네 남매의 삶을 중심으로 사랑과 이상의 관계를 묻기도 한다.(「외로운 사람들」)박민정의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진 ‘혐오’를 현대의 시각에서 보다 복잡하고 교묘해진 양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김명순에게 ‘절대적인 외로움’으로 표출되었던 그것은 박민정에게는 ‘공포’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천사가 날 대신해」에서 ‘나’는 오랜 동창생 세윤의 죽음을 마주하고 큰 혼란에 빠진다. 전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했던 세윤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세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무엇인지. 그러나 소설은 죽음에 관한 진실을 규명하는 이야기에서는 비켜서 있으며, 그 죽음의 원인이 되는 우리의 “현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섬세하고 집요한 의심 속에서 살펴”본다. (박인성 평론가)박민정 작가는 이번 작업의 소회를 담은 에세이에서 “‘의심의 아이’가 ‘불쌍한 아이’로 귀결되기까지의 이야기”인 「의심의 소녀」를 의식해 작품을 썼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써온 자신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아이 역시 바로 이 ‘의심의 소녀’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 더불어서, 김명순의 자전적 글쓰기는 그에게 가하는 세상의 오해와 모욕을 드러내기 위한 ‘서술 전략’이었음을 짚어내며 그의 철저한 작가정신을 기리고 있다.
움직임
“어둠 속에서 발견한 빛이 가장 밝다” 2024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조경란 가족 서사의 애틋한 시작점
“어둠 속에서 발견한 빛이 가장 밝다”2024 이상문학상 수상 작가조경란 가족 서사의 애틋한 시작점“서사적 완결성을 담보하는 치밀한 구성과 정교하게 다듬어진 간결한 문장”(권영민 교수)이라는 상찬을 받으며 2024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조경란 작가. ‘소설, 향 리마인드’를 통해 새롭게 선보이는 『움직임』은 장편 『가족의 기원』에서부터 연작소설집 『가정 사정』에 이르기까지, 가족이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해온 조경란 가족 서사의 시작점에 놓인 소설이다.작가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주제는 “문학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그 출발의 책이 바로 『움직임』”이다. 초판에서 스무 살인 주인공 이경에게 더 “밝은 집, 밝은 미래”를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는 그는 이번 개정판에서 현재의 시선으로 원고를 살피고 가다듬는 한편, 문장을 추가해 “제대로 된 삶의 한 방향”을 열어주었다.사물들과 삶의 주변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우수를 그린 『나의 자줏빛 소파』를 비롯하여 여덟 권의 소설집과 네 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조경란은 문학동네작가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에 이르는 주요 문학상을 받으며 우리 시대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해왔다. 『움직임』은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성실하게 일궈온 그의 작품 세계를 톺아볼 때, 나와 가족의 범주를 넘어 사회와 시대의 단면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조경란 가족론의 원형과 발아를 엿보게 한다.엄마를 잃은 주인공 신이경(‘나’)은 혼자 있기 싫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를 따라 외갓집으로 오지만 여전히 어둡고 우울한 삶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 이경은 내팽개쳐진 조그만 화단을 다시 가꾸기 시작하고, 가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이상한 동물원 같은 외갓집에서 새로운 가족을 꿈꾼다.이 작품의 해설을 맡았던 고(故) 김미현 평론가는 “세상 자체가 본래 요람이 아닌 무덤”임을 인정한 후에야 비로소 세상은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설명대로, 조경란은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안전지대는 없”으며, “집 안에서 가족과 이루는 삶”이나 “집 밖에서 가족 아닌 사람과 이루는 삶”이 크게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세계에 대한 허무맹랑한 낙관 대신 이와 같은 냉철한 현실 인식을 통해 우리는 삶에서 도피하는 대신 저항할 수 있으며, 어둠 속에 함몰되는 대신 그 어둠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변화는 결국 ‘나’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발견이 소외된 자들을 챙기는 작가의 세심한 헤아림과도 맞물려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단숨에 읽히면서도 그 여운을 오래 곱씹게 하는 이 소설은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불안해하고 아파하는 모든 ‘이경’들에게 작가 조경란이 건네는 조용한 ‘움직임’이다.
기도를 위하여
다른 시간,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작가가 접속하고, 깊이 연루되고, 함께 걸어나가다
“순수 귀신을 몰아내라”, 대중소설가를 선언한 김말봉우리 문학의 독창적이고 ‘희귀한’ 자리, 박솔뫼다른 시간, 다른 시대를 살았던 두 작가가접속하고, 깊이 연루되고, 함께 걸어나가다 ‘소설, 잇다’의 네 번째 책, 김말봉과 박솔뫼의 『기도를 위하여』가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최초의 근대 여성 작가 김명순이 데뷔한 지 한 세기가 지났다. ‘소설, 잇다’는 이 시점에서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백 년 시공을 뛰어넘는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의 또 다른 근원과 현재를 보여주고자 기획되었다. 그 첫 번째로 백신애와 최진영이 어우러진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를 출간했다. 두 번째로 지하련과 임솔아가 함께한 『제법 엄숙한 얼굴』을, 세 번째로 이선희와 천희란의 『백룸』을 펴냈다. 네 번째 작품은 김말봉과 김말봉 소설을 입체화한 박솔뫼의 소설을 담은 『기도를 위하여』이다.김말봉은 1930년대 식민지 시기 독보적인 스타일로 혜성같이 등장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질문에 ‘돈 벌려고 쓴다’고 대답했던 그는 순수소설만을 인정하던 당시 문학계에서 스스로 ‘대중소설가’임을 당당히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흥미 본위의 통속소설에 함몰되기를 경계하고, 민족 해방과 여성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위한 운동에 앞장서고, 글을 통해서는 애정 문제의 기저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기독교적 박애정신을 담았다.“전혀 새로운 눈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사회적 모순과의 긴장을 잃지 않게 만드는 능력”을 가졌으며(김형중 평론가), “희소하고 희박한, 보존되어야 할 어떤 삶과 가치를 일깨운다”(손정수 평론가)는 평가를 받은 박솔뫼는 『머리부터 천천히』부터 『미래 산책 연습』에 이르기까지 실험적 서사와 문체로 고유한 문학적 성취를 쌓아왔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시공간의 구분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사라진 지점에서 오히려 선명하게 과거와 현재, 미래가 감지되는 아이러니를 발견한다.『기도를 위하여』에 실린 김말봉의 대표 단편 「망명녀」(1932), 「고행」(1935), 「편지」(1937)는 작가 특유의 통찰과 위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기생, 운동가, 아내, 애인 등 여성 인물들은 때로 나라를 위해 투신하거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인습의 폐단을 고발한다. 기생이었던 주인공 순애가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모하거나(「망명녀」), 불륜을 저지른 남성은 벽장 안에 갇혀 ‘수치’와 ‘굴욕’을 겪는다.(「고행」) 남편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단 한 통의 편지로 여지없이 깨어져버리기도 한다.(「편지」) 세 편의 소설은 대중, 즉 민중들의 삶을 담백하고 명쾌하게 그려내면서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다.박솔뫼의 「기도를 위하여」는 김말봉의 데뷔작 「망명녀」의 뒷이야기를 이어 쓴 소설이다. 「기도를 위하여」는 「망명녀」의 최순애와 윤정섭(윤)이 옥중 혼례를 치르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혼례 후 윤숙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순애는 머지않아 목숨을 거둔다. 그러나 순애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두 사람과 함께인 채다. 또 다른 이야기 축은 김말봉의 주 본거지인 부산의 구도심을 산책하는 1인칭 화자의 서술이다. 이렇게 소설은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을 취하는데, 이는 주인공 순애를 기억하는 동시에 작가 김말봉을 기억하는 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 파편적으로 흩어졌던 것들을 다시 연결하면서, 현재 우리가 발 붙인 세계에 대한 감각을 “새로이 갱신”한다. 김말봉 작품을 통해 박솔뫼가 읽어낸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은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걷도록 만드는 동력”(박서양 평론가)이 된다.소설은 또 하나의 지금 이 세상이다. ‘소설, 잇다’를 통해 근대와 현대의 여성 작가들이 무엇을 말하고 고뇌하며 삶을 탐구했는지, 또 백 년의 시간 동안 이들의 생각과 마음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우리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근간은 과연 변화될 수 있을지를 곰곰이 돌이켜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을 지나가다
작가 조해진이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에게 바치는 헌사 박준 시인 · 김혼비 작가 추천!
“작가 조해진이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에게 바치는 헌사”신동엽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수상 작가 신작 소설박준 시인 · 김혼비 작가 추천!“그의 소설은 희망이다. 미래에 꺼내 쓸 빛을 품고 있으니까.”_김혼비(에세이스트)“이토록 작은 사실들을 그러쥐고 작가는 그리고 우리는다시 허름한 사랑을 시작합니다.”_박준(시인)작가정신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 향’의 여덟 번째 소설,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가 출간되었다. 2022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완벽한 생애』와 짧은 소설집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소설이다. 2004년 등단한 이래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들려준 조해진 작가는 여섯 권의 장편과 다섯 권의 소설집을 발표하고, 신동엽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만의 작품 세계를 펼쳐왔다.『겨울을 지나가다』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엄마와 사별한 뒤 홀로 남겨진 주인공이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이다. 필연적으로 작별을 겪어야 하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커다란 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또 다른 아픈 이를 향해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조해진 작가가 보여온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는 시선은 여전하지만, 삶 그 너머까지를 아우르는 한층 더 깊어진 사유와 정밀하게 세공된 문체로 보다 따스한 희망을 빛을 선사하고 있다.소설은 밤이 연중 가장 긴 날인 ‘동지’와 가장 추운 시기인 ‘대한’, 날씨가 풀려 초목이 싹트는 ‘우수’에 이르기까지 절기의 변화에 따라 진행된다. 아픔을 딛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는 주인공의 옆에는 절기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이 있었다. 침묵을 지키는 안개와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새, 흐르는 물소리를 들려주는 강이 있었다. 엄마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실감할 수 없고, 자신을 향한 걱정이 때론 외로움으로 내몰기도 하지만, “아직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 어둠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누군가를 돌보려는 마음이 있었다.김혼비 작가는 이 소설을 읽고, “상실 이후의 삶과 애도의 의미에 관해 사려 깊고 면밀하게 써 내려간” 작품이며 “조해진의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젠가 무너져 내렸을 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힘을 비축해두는 일”이라고 추천했다. 박준 시인 또한 “별 기대 없이 돌보던 것들이 실은 나를 보살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다시 허름한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소설이라는 소감을 남겨주었다.
백룸
나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견딜 수 없을 ‘미궁’에 관한 소설들
나 자신이 누구인지,그리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더더욱 견딜 수 없을 ‘미궁’에 관한 소설들‘소설, 잇다’의 세 번째 책 『백룸』이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 ‘소설, 잇다’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또 함께’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백룸』에서는 이선희와 천희란의 소설을 함께 실었다. 도시적 감수성의 모더니스트로 평가받은 이선희는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섬세한 심리 묘사와 감각적 문체를 통해 그려내며 1930년대 대표 여성 작가로 활발히 활동했으나, 월북한 이력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서 충분히 읽히거나 기록되지 못했다.삶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정교한 서사로 그려온 작가 천희란은 사회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왔다. 외부 세계로부터 야기된 분열과 혼돈 속에서도 잃지 않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또 그러한 정체성을 규정하는 틀은 무엇인지 탐색해온 천희란과, 자신을 둘러싼 억압과 착취의 정체를 캐묻고 욕망에 대한 자각을 놓지 않았던 이선희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다. 그들의 소설에는 계속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여성들이, 좌절과 파멸과 때론 죽음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스스로 걸어들어 가 ‘지옥’을 맞닥뜨리는 담대함과 용기가 가로놓여 있다.이 책에 실린 이선희의 대표 단편 「계산서」(1937)와 전문(全文)을 실어 선보이는 장편 「여인 명령」(1937~1938)은 가정과 가정 ‘바깥’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로, 여성의 자아 확립과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소설 속 여성들은 궁지에 내몰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목숨 값을 당당히 ‘청구’하거나(「계산서」), 연인 사이였던 남자에게 자신의 아들을 입적할 것을 ‘명령’한다(「여인 명령」). 특히 「여인 명령」에서 대학생, 백화점 점원, 술집 여급 등으로 주인공의 지위가 변화와 몰락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근대화의 산물인 자유연애의 허상과 결혼제도가 지닌 불합리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천희란은 소설 「백룸」을 통해 이선희 작품에 나타난 주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동시에 지금도 여전히 여성을 옭아매는 ‘틀’이자 무한히 반복, 재생산되는 ‘미궁’을 펼쳐 보인다. 세계는 일상적 규범성이라는 이름 아래, 엄연히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하며 특정 존재를 지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천희란은 바로 그 규범성을 문제시하며, 탈출 불가능한 미궁과도 같은 현실에 처하고도 우리로 하여금 출구를 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묻는다.나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을 ‘미궁’을 그려나가는 천희란에게 이선희 작가는, “‘지속된 한계’를 벗어던지기 위해 새로운 지옥을 찾아 나선 여성”이었으며, 소설을 쓰는 내내 “그저 그 지옥을 함께 걷고자 했다”는 말로 이번 작업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 있다.
환승 인간
“좋아하는 마음은 강하며, 멀리 간다” 『소녀 연예인 이보나』 · 『마고』의 작가 한정현 첫 산문집
“좋아하는 마음은 강하며, 멀리 간다”『소녀 연예인 이보나』· 『마고』의 작가한정현 첫 산문집 2019년 오늘의 작가상 · 2021년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 한정현의 첫 산문집 『환승 인간』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자신을 ‘환승 인간’으로 표현한 작가가 지금껏 자신을 거쳐 간 수많은 ‘이름’들에 관한 이야기들과 2022년 한 해 동안 채널예스에 ‘한정현의 영화적인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칼럼들을 함께 엮은 것이다. 작가는 『환승 인간』을 통해 ‘인간 한정현’에서 ‘작가 한정현’으로, 또 그 반대로 자유로이 환승해 가면서 내밀하고 비밀스러우며 한정현식의 유머와 통찰이 있는 특별한 ‘환승’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특기는 ‘환승’이었다는 작가. 작가는 스스로 난희, 경아, 경희, 서아, 프란디에 등 스무 개도 넘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였다. 그러자 하나의 이름에 묶여 한정된 삶을 사는 것보다는 덜 무료했고, 때론 ‘한정현’에게 부과된 인생의 무게도 가벼워졌다. 환승을 통해 몇 개의 삶을 거듭하며 그 안에서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는 좋아하는 사람을 통해 봐야 한다”는 한정현 작가에게 환승은 ‘좋아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와 다르지만, 어쩌면 너무도 닮은 타인들을 깊이 이해하고 다가가기 위한 마음. 소설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 등장했던 ‘이보나’와 ‘제인’, ‘주희’도 그러한 마음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이처럼 작가는, 문학과 비문학, 예술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좋아하는 힘으로 나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마치 내 옆에 가까이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이 책에서 한정현 작가는 데뷔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과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 관한 개인사적 일화들, ‘비문학 영역’이라 스스로 칭했던 연애와 이별, 그리고 사랑의 단상 등을 조곤조곤하게 들려준다. 보다 온전하게 ‘나’로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줄 모든 ‘환승’들을 통해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꺼이 손을 잡았던”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제법 엄숙한 얼굴
지하련과 임솔아가 함께 그려내는 인간의 가장 진실한 표정 외로움을 아는 사람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얼굴 하나
지하련과 임솔아가 함께 그려내는인간의 가장 진실한 표정외로움을 아는 사람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얼굴 하나 ‘소설, 잇다’의 두 번째 책 『제법 엄숙한 얼굴』이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 ‘소설, 잇다’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또 함께’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제법 엄숙한 얼굴』에서는 지하련과 임솔아의 소설을 함께 실었다. 지하련은 1940년대 활발히 활동하며 식민지 지식인의 위선과 무기력을 지적인 언어로 분석하는 작품들로 당대의 주목을 받았으나, 임화의 아내이자 사상적 조력자로 좁게 해석되고 월북 이력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 충분히 기록되지 못한 작가다. 젊은작가상 대상, 문지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수상 작가 임솔아는 늘 우리 시대의 가장 치열한 질문을 쥐고서 특유의 단단한 언어로 우리 사회의 허위와 폭력을 직시해왔다. 임솔아가 일상의 작은 틈새를 담담하게 가리키는 동시에 그 균열의 근원을 좇아 탐구하는 방식과, 식민지 조선의 피폐를 끊임없이 관찰하면서도 기약 없는 절망이나 손쉬운 반성으로 빠지지 않았던 지하련의 회의는 서로 다른 시대임에도 매우 닮아 있다. 이 책의 실린 「결별」(1940) 「가을」(1941)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부장제의 모순과 억압을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지하련의 작품 세계의 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한편 「체향초」(1941) 「종매」(1948)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지식인 혹은 전향자 ‘오라버니’와 ‘누이’의 구도는 실제로 그의 오빠들과 자신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실과 연관이 깊다. 그의 작품 속‘아내’와 ‘누이’는 지하련이 그러했듯 가부장제 속 여성으로서, 식민지하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매 순간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들이다.임솔아의 소설 「제법 엄숙한 얼굴」의 제목은 「체향초」에서 가져온 것으로, 무기력한 지식인 오라버니와 대비되며“남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태일이라는 지식인 청년의 인상을 주인공인 삼희가 묘사하며 등장하는 표현이다. 임솔아는 지하련이 예리하게 분석해낸 식민지 지식인 남성의 허위의식과 오늘날의 남성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간의 다름과 미묘한 같음”(임솔아 에세이)에 주목하여 과거와 비교해 보다 교묘해지고 겹겹의 구조를 이루게 된 차별과 폭력의 양상을 소설 속에 탁월하게 그려낸다. 지하련과 임솔아는 모두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직시하면서도 비관에 머물지 않고, 소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움이 무엇일지 궁리하며 계속해서 움직여왔다. 지하련과 임솔아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출발해 만들어낸 이 처음 만나는 길 위에서 우리가 새로운 길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젊은작가상 대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수상 작가 정지돈이 이어내는 미래와 과거의 발걸음 네 편의 ‘모빌리티’ 픽션, 에세이 그리고 대화
달려가는 캡틴 아메리카와 걸어오는 윈터 솔져,거리를 장악한 공유 킥보드와 자전거……도시와 사람들, 장소와 움직임에 대한 독보적인 사유 그리고 수다! 데뷔 이후 10년 간 독창적인 형식과 언어로 매번 새롭게 주목받아온 작가 정지돈의 첫 번째 연작소설집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 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이 출간됐다. 정지돈은 이번 연작에서 ‘모빌리티’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장소와 움직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어내며 다시 한번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과 그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소설집에 담긴 네 편의 연작은 파리와 서울을 배경으로 해‘나’와 그의 파트너 엠이 도시를 산책하고 또 뛰면서 겪는 일상적이면서도 기이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동시에 발터 벤야민 의 산책부터 캡틴 아메리카의 달리기까지,‘모빌리티’에 대한 정지돈 특유의 매력적인 레퍼런스와 위트 있는 통찰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다소 생소한 용어인 ‘모빌리티’는 “움직임, 그것과 분리할 수 없는 움직임의 재현과 의미,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움직임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정지돈은 이러한 개념을 소설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와 이동 혹 은 움직임을 “A에서 B로 가는 것 이상을 의미”(안은별, 덧붙임)하는 것으로 확장한다. 그렇게 그가 소설 속에 담아내는 ‘모빌리티’에 관한 이야기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나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소설과 소설이 관계 맺는 방식 등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채로운 질문들을 전한다. 소설집에는 네 편의 소설에 더해 산책과 도시에 대한 작가의 에세이와 문화연구자 안은별의 ‘모빌리티’ 에 대한‘덧붙임’「생각의 열차」, 그리고 두 사람의 다정하고도 성실한 대화가 함께 실려 있다. 이 글들 은 수록된 소설에 해설과 주석을 다는 방식이 아니라, 소설과 이어지며 ‘모빌리티’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 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한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 나가는 이 책은 독자에게 지 금껏 경험해본 적 없던 새로운 움직임과 장소를 선사할 것이다. 호박돌은 집터 따위의 바닥을 단단히 하는 데 쓰는 둥글고 큰 돌을 말한다. 도시 건설 과정에서 무수히 깨지고 사라져간 이 돌들은 무의미하고 잡스럽게 여겨지거나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내겐 이러한 여담이 세계를 지지하는 구성물처럼 여겨진다. 무슨 역할을 하는지 짐작하기 힘들고 진실 또는 거짓의 경계가 불분명 하며 때로는 실존하는지 여부도 불투명한 사물들, 기억들, 일화들의 우주. 걷기는 이러한 틈새를 마주하는 급진 적인 행위다. _에세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에서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의 첫 번째 책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백신애와 최진영, 시대를 넘어 이어나가는 여자들의 사랑의 실험
‘소설, 잇다’의 첫 번째 책『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백신애와 최진영,시대를 넘어 이어나가는 여자들의 사랑의 실험 ‘소설, 잇다’의 첫 번째 책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가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 ‘소설, 잇다’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또 함께’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강경애, 나혜석, 백신애, 지하련, 이선희 등 근대 대표 여성 작가들의 중요 작품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현대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변주함으로써, 근대 여성 작가의 마땅한 제 위치를 찾아내고,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현대 작가가 어떻게 당당히 길을 내어 그 궤적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한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에서는 백신애 작가와 최진영 작가의 소설을 담았다. 백신애는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방황하는 실향민들을 그린 「꺼래이」(1934), 현모양처의 삶을 살았음에도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의 심정을 담아낸 「광인수기」(1938) 등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5년 남짓한 기간 동안 수십 편의 소설과 수필 및 기행문 등을 남겼다. 또한 「아름다운 노을」에서는 소년을 사랑하는 화가를 통해 여성의 애욕을 그려내는 등 민중의 궁핍한 삶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여성의 능동성을 금기하는 사회적 억압을 의문시하는 데까지 다양한 문제에 걸쳐 있었다.최진영은 제13회 백신애문학상 수상자로, 여성, 비정규직, 실업 청년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왔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15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을 비롯해, 죽은 연인의 몸을 먹는 애도의 방식을 통한 처절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구의 증명』)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은 혼란 속 두 여자의 로맨스(『해가 지는 곳으로』), 친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일기(『이제야 언니에게』) 등을 통해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이 자기 삶을 찾아가며 끝까지 살아내는 방식을 그려냈다. 이 책에 실린 백신애의 소설 「광인수기」(1938), 「혼명에서」(1939), 「아름다운 노을」(1939)은 작가의 생애 마지막에 쓴 후기 주요 작품으로, 실제로 이혼과 고통스러운 투병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발표된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전향 지식인의 부인으로서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며 미쳐버린 여성이거나, 가부장제 가족제도로부터의 탈피를 부르짖는 이혼한 신여성이거나, 13세 연하의 소년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예술적 욕망으로 치환하려는 화가이다. 표제작인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에서 최진영은 백신애가 백 년 전에 제기했던 여성 억압의 문제를 “사랑이 주는 다정함과 위안, 설렘과 따뜻함”으로 풀어낸다. 이번 소설에서 그는 백신애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강렬한 정념에 이끌리는 사랑이 아닌 “서서히 사로잡히는” 사랑을 그린다. 사십 대 여성과 이십 대 여성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은 ‘금지된 욕망’도 ‘파격적인’ 무엇도 아니기에 “가장 편안하고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두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은 백신애가 살던 백 년 전과 동일하게 21세기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여성을 비롯하여 소수자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공포”와 멀리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은 “직장과 가정이 주는 피로감” 안에서 나를 나이게 하는 자유로운 순간이 되기도 하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 ‘반짝 빛을 내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백신애가 선택했던 사랑의 ‘정체’와 최진영이 선택한 사랑의 ‘힘’이, 그리고 두 사람이 그려낸 ‘사랑의 연대’가 “천천히,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물며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