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소설, 향’ 열한 번째 작품
이효석문학상 대상, 문학동네작가상 수상 작가
장은진 첫 중편소설 출간!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간단치 않은 질문을 받은 기분이다.
혹시 이런 말은 어떨까.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그게 무엇이든 말이야.
_정이현(소설가)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되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을 알게 되는 일은 늘 감동적이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이따금 꺼내 읽으며 삶의 양분으로 삼아보고 싶다.
_차경희(고요서사 대표)
작가정신 중편소설 시리즈 ‘소설, 향’의 열한 번째 작품, 장은진 작가의 『세주의 인사』가 출간되었다. 200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그는 첫 소설집 『키친 실험실』에서 “출구 밖 타인들을 향한 소통에의 욕구”(김형중 평론가)를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2009년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와 2019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외진 곳」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중심에서 소외된 이들의 자리를 끈질기게 비추면서, “여운을 남기는 압축적 구성과 명징한 유머”(신수정 평론가), “플롯도 잘 짜낼 수 있고 문장도 생기 있게 구사할 수 있는 작가”(방민호 평론가)라는 상찬을 이끌며 고유한 작품 세계를 일구어왔다.
『세주의 인사』는 ‘세주’와 ‘동하’라는 두 청년이 마음속 깊이 각인된 상처를 지니고서 살아가고 또 사랑하는 방식을 그린 작품이다. 만남에서 이별로, 이별에서 작별로 나아가며 자존과 자립, 타인에 대한 관용과 환대의 의미를 일깨우는 이 소설은 연애소설 아닌 연애소설이자 성장소설 아닌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애정에서 비롯된 갈등이 주가 되진 않지만 관계를 시작하고 매듭짓는 데 수반되는 미묘한 내면 심리를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서른을 앞둔 두 사람이 세계의 끝을 걷고 또 걸어서 마침내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한다는 ‘어른의 성장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일 년 전 헤어진 여자 친구 세주가 어느 날 책이 든 냉장고와 화분을 동하에게 맡긴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데, 동하는 자신이 없는 사이 집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탓하기보다는 세주의 안위를 먼저 걱정한다. 이처럼 이별 후에 다시 시작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둘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은 단 한 번뿐으로, 그들의 시간과 공간이 어긋나고 교차하다가 어느 순간 접점에 이르는 장면을 통해 장은진 작가의 주된 화두인 ‘사랑’의 본질은 더욱 확장되고 깊어진다. 한 인간이 또 다른 한 인간을 향해 이해의 폭과 깊이가 늘어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홀로였다면 만나지도 겪어내지도 못했을 사건과 감정 들은 사랑에 연루된 두 사람을 성장으로 이끌어간다. 세주와 동하는 성년이 된 나이를 지났어도 여전히 관계에 미숙했고 어리석었으며 그래서 좌절했지만, 과거의 순간들을 다시금 용기 있게 대면하면서 비로소 실패를 인정하고 절망조차도 다독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일 년 만의 만남, 육 개월 후의 재회, 그리고 또 일 년여가 지나 마주한 해후. 서로를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시간의 길이와 넓이”만큼 두 사람은 나란히 자라고 또 자란다. 밤에 노랗게 눈 뜬 창문들을 바라보면 덜 외롭다는 걸 알려준 세주에게 고마웠다고, 잊으려 애쓰던 제 나이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동하에게 이제는 괜찮다고, 감사와 안부의 인사를 건넬 수 있을 만큼.
정이현 소설가는 “애틋하고 다정한 여운 너머의 더 먼 곳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갈 청년”들을 다룬 이 소설을 읽고,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간단치 않은 질문을 받은 기분”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차경희 고요서사 대표는 이 작품이 “눈부신 빛이 아닌, 그늘을 아는 자들이 쓰고 읽는 소설”이며,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되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을 알게 되는 일은 늘 감동적이다”라고 추천의 이유를 밝혀주었다.
출판사 서평
“자기 걸 다 맡기고 떠난 세주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을까”
첫 번째 인사,
세주 없는 세주와의 만남이 다시 시작됐다
세주가 다녀갔다. 동하가 집을 비웠을 때였고 두 사람은 일 년 전 헤어진 사이였다. 침대 옆에 놓인 낯익은 소형 냉장고, 그 위에는 새싹 형태인 토기 화분이 놓여 있었다. 냉장고를 열자 칸마다 책들이 빼곡했다. 냉장고 문 앞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세주가 적은 메모가 있었다. ‘냉장고와 화분을 부탁한다’는 문장 옆에 쓰다 만 자음 ‘ㅁ’까지, 급히 쓴 메모가 분명했고 할 말이 더 있지만 서둘러 마무리 지은 것 같았다. 곧이어 동하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주의 친구들도 세주로부터 물건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캐리어와 화분, 향수와 화분, 드럼세탁기와 화분…… 공통점은 화분이었다. 세주는 동하와 헤어진 후에 가진 돈을 털어 식물 상점을 냈지만 얼마 안 가 폐업했고, 집과 가게, 살림살이를 모두 정리하고 ‘세계의 끝’을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떤 마음이 생기면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될까.” 그걸 알고 싶어서 동하는 냉장고에 채워진 세주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다.
세주는 동하에게 “냉장고와 화분을 부탁해”라고 말했다. 부탁은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며, 보관의 의미에 가깝다. 그것은 어느 한쪽의 완전한 소유가 아니라 주고받은 두 사람이 나눠 갖는 것이다. 세주가 동하의 집에 들러 물건을 놓고 간 뒤, 잘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차 또다시 방문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로 “복잡다단한” 한 시절을 함께한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으므로. “머릿속에 끼어 있는 뿌연 연기도 말끔하게 거둬 가”는 식물은 “맑고 편한” 삶을 바랐던 세주의 꿈이었으며, “삶이 고단할 때마다 몸을 기댔던” 책들은 “전부라고 생각해서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이기도 했으니까.
“왜 나한테 냉장고를, 아니 책을, 아니 냉장고에 책을 넣어서 줬어?”
“헤어진 사이라서.”
‘버려진 관계’가 아니라 ‘헤어진 관계’가 남겨준 것들
서른 살. 가족과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와 한 번 이상의 꿈을 실행하고, 한 번 이상의 꿈을 체념했을 나이. 그런데 두 청년 ‘세주’와 ‘동하’에게 가족은 슬픔을, 학교는 고통을 안겨준 무력한 울타리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둘은 그대로 세상으로 내던져진다. 보통의 삶으로 향하고 싶었지만 녹록지 않았던 이들. 두 사람은 그런 서로를 알아보고 가까워지지만 생각도 감성도, 고통도 슬픔도 제각각 달랐던 그들은 해명하고 설명하는 수고를 들이는 대신 차라리 오해를 택한다. 결과는 당연히 이별이었다.
육 개월간의 길지 않은 만남 끝에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동하와 세주는, 그러니까 이미 헤어진 관계였다. 하지만 바로 그 ‘헤어진 관계’라는 사실이 세주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던 다른 남자들과 달리 동하는 이별의 책임을 따져 묻고 자신에게 비난을 가했던 것이다. “버림에는 티끌만큼의 감정과 미련도 남지 않아서 뒤돌아볼 일 같은 건 생기지 않”지만, 동하는 아니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 그 책들로 채워진 냉장고를 부탁할 사람으로 동하가 떠올랐던 건 다름 아닌 “버려진 관계가 아니라 헤어진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세주는 “한 사람한테라도 지난 시간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싶었”고, 그 한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끝내 손을 놓았던, 그러기에 더욱이 원망이나 미움이라는 감정적 온도가 남아 있을 동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떠나도 다른 건 없지만 달라지는 것은 있다”
한 사람이 또 다른 한 사람의 시간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것
우정과 신뢰의 작별 인사
책이 든 냉장고와 화분이 함께한 일주일간의 여름휴가. 적정량의 빛과 물이 필요한 반그늘 식물을 키울 줄 몰랐던 동하였지만, 그사이 그는 세주가 맡긴 화분인 문샤인 산세베리아처럼 자라난다. 식물을 정성 들여 돌보고, 책 속의 무수한 밑줄들을 곱씹고, 책갈피에서 발견한 세주의 가족사진을 살피면서, 그리고 세주와 나눈 ‘ㅁ’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통해서 동하는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멀리떠나도다른건없다, #머물게해줘서고마워, #무엇이있을까세계의끝에는. 세주와 동하가 나눈 대화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ㅁ’으로 시작한다. 「외진 곳」에서 다단계 사기를 당한 두 자매가 거처했던 ‘ㅁ’ 구조의 네모집은 ‘가난’을 상징하는 “차갑고 초라”한 장소였다. 이번 소설에서 포스트잇과 인스타그램으로 이어가는 ‘ㅁ’의 자리는 미처 못다 한 말 그 자체이면서 “회복과 연대”의 공간으로 마련된다. 그 뒤로 좀 더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다른 삶과 미래를 찾으러 ‘세계의 끝’을 보고 온 세주는, 필요한 것이 전부 없게 된 세주는, 이제 존재 자체만으로 오롯이 충만해 보였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는가”라고 묻는 이 소설은 청년 세대의 고독과 불안, 약자에 대한 폭력, 죽음과 상실 등을 다루면서도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과 슬픔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늘 빛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소설을 읽을 누군가, 세주와 동하의 곁에서 그들이 앞으로 걸어나갈 자리를 바라봐줄 거라는 단단한 믿음과 함께.
결국 그들 곁에 있어준 사람은 내가 아닌 당신일 것입니다. 있어준 당신에게 그들은 인사를 건넬 것입니다. 고맙다고. 괜찮아졌다고. 덕분에 따뜻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었다고. 드디어 전깃줄에 새가 내려앉았다고.
_‘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