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과 임솔아가 함께 그려내는
인간의 가장 진실한 표정
외로움을 아는 사람의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얼굴 하나
‘소설, 잇다’의 두 번째 책 『제법 엄숙한 얼굴』이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 ‘소설, 잇다’ 시리즈는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또 함께’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제법 엄숙한 얼굴』에서는 지하련과 임솔아의 소설을 함께 실었다. 지하련은 1940년대 활발히 활동하며 식민지 지식인의 위선과 무기력을 지적인 언어로 분석하는 작품들로 당대의 주목을 받았으나, 임화의 아내이자 사상적 조력자로 좁게 해석되고 월북 이력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 충분히 기록되지 못한 작가다.
젊은작가상 대상, 문지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수상 작가 임솔아는 늘 우리 시대의 가장 치열한 질문을 쥐고서 특유의 단단한 언어로 우리 사회의 허위와 폭력을 직시해왔다. 임솔아가 일상의 작은 틈새를 담담하게 가리키는 동시에 그 균열의 근원을 좇아 탐구하는 방식과, 식민지 조선의 피폐를 끊임없이 관찰하면서도 기약 없는 절망이나 손쉬운 반성으로 빠지지 않았던 지하련의 회의는 서로 다른 시대임에도 매우 닮아 있다.
이 책의 실린 「결별」(1940) 「가을」(1941)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부장제의 모순과 억압을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지하련의 작품 세계의 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한편 「체향초」(1941) 「종매」(1948)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지식인 혹은 전향자 ‘오라버니’와 ‘누이’의 구도는 실제로 그의 오빠들과 자신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사실과 연관이 깊다. 그의 작품 속‘아내’와 ‘누이’는 지하련이 그러했듯 가부장제 속 여성으로서, 식민지하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매 순간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들이다.
임솔아의 소설 「제법 엄숙한 얼굴」의 제목은 「체향초」에서 가져온 것으로, 무기력한 지식인 오라버니와 대비되며“남성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태일이라는 지식인 청년의 인상을 주인공인 삼희가 묘사하며 등장하는 표현이다. 임솔아는 지하련이 예리하게 분석해낸 식민지 지식인 남성의 허위의식과 오늘날의 남성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약간의 다름과 미묘한 같음”(임솔아 에세이)에 주목하여 과거와 비교해 보다 교묘해지고 겹겹의 구조를 이루게 된 차별과 폭력의 양상을 소설 속에 탁월하게 그려낸다.
지하련과 임솔아는 모두 현실의 모순과 억압을 직시하면서도 비관에 머물지 않고, 소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움이 무엇일지 궁리하며 계속해서 움직여왔다. 지하련과 임솔아가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출발해 만들어낸 이 처음 만나는 길 위에서 우리가 새로운 길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하련
1912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쇼와고녀를 졸업하고 도쿄경제전문학교에서 공부했다. 본명은 이숙희로, 지하련이라는 필명을 쓰기 전에는 이현욱이라는 이름으로 수필 등을 발표하고 문인들과 교류했다. 1940년 《문장》에 단편 「결별訣別」이 추천되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대 초 「체향초(滯鄕抄)」 「가을」 「산길」 등의 단편소설과 시, 수필 등을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1946년 발표한 단편 「도정(道程)」이 해방기념문학상 후보작으로 선정되며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36년 결혼한 시인 임화와 함께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으며 1947년 경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유일한 소설집 『도정道程』이 남한에서 출간됐다. 1953년 임화의 실각 및 처형 이후 1960년 초 평북 희천 부근 수용소에서 병사했다고 추정된다.
임솔아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 시 부문,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신동엽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장편소설 『최선의 삶』,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등이 있다.
지하련
소설
「결별」
「체향초」
「가을」
「종매」
임솔아
소설
「제법 엄숙한 얼굴」
에세이
「약간의 다름과 미묘한 같음」
해설
가장 깊은 사랑, 가장 깊은 사람_박혜진(문학평론가)
“후회하지 않는 얼굴…… 싸늘히 밝은 눈으로 행위했고
그 눈으로 내일을 피하지 않는 얼굴”
지하련의 누이와 아내 들이 똑똑히 말하는
사랑의 긍지, 이념의 고독
지하련의 「결별」은 기혼 여성 형예가 친구 정희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보내는 하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편과 다툰 이후 자신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의심하던 형예는 결혼으로 들뜨고 순수한 성격의 정희와 예의바르고 차분한 면모를 지닌 그의 남편과 어울리며 우정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떠올리는 동시에 결혼 제도의 모순과 가부장제의 억압을 느끼게 된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형예는 일방적으로 소통을 차단하는 남편에게 모멸감을 느끼며 내면에서 진정한 ‘결별’을 이루게 된다.
「체향초」는 주인공 삼희가 요양차 고향의 오라버니의 집에 머물며 오라버니와 오라버니의 친구 태일을 관찰하게 되는 이야기다. 오라버니는 낙향해 농사를 짓는 인물로 세상을 등진 지식인 혹은 전향한 사회주의자로 보인다. 삼희는 그에게 “생활표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며 좌절한 지식인으로서의 무기력과 패배 의식을 감지한다. 태일이라는 청년은 오라버니가 흠모하는 지식인으로 “생명과, 육체와, 또 훌륭한 ‘사나이’란 자랑”을 지녔다는 오라버니의 평과 같이, 무기력한 오라버니와 대비되는 특성을 지닌 인물이다. 그 자신도 지식인인 삼희는 두 남성을 곁에서 주의 깊게 관찰하며 당대의 식민지 지식인들의 위선과 모순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이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가을」은 친구의 남편 석재를 사랑하는 정예의 이야기가 석재의 시점을 통해 전개되는 소설이다. 병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석재는 오랜만에 찾아온 정예를 만나 지난날을 회상한다. 정예는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석재에게 만남을 청하는 등의 행동으로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일종의 연적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또 다른 복잡한 연애 관계에 대한 풍문 등으로 인해 석재에게는 병적으로 고백을 일삼는“고백병”을 지닌 불쾌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석재는“후회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서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정예를 대면하게 되면서 정예의 용기와 긍지, 그리고 자신의 편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종매」에는 병을 앓고 있는 철재라는 화가와 그와 함께 생활하게 된 세 명의 지식인 청년이 등장한다. 유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석희는 사촌 여동생 정원의 부탁으로 사찰에서 철재를 간호하며 셋이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이후 석희의 유학 시절 친구이자 야망을 지닌 청년인 태식이 절에 합류한다. 작은 암자에서 생활하는 병든 철재, 큰절에서 생활하며 화려함을 지향하는 태식,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오가는 석희와 정원은 무기력하면서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긴장감을 지닌 “어떤 공동한 생활 분위기”를 형성한다. 소설은 이념과 가치에 대한 공통된 지향 없이 오로지 연민으로만 이어진 이들의 공동체를 통해 좌절하고 무기력한 지식인 집단을 환기시키며 계속해서 방황하는 석희를 중심으로 성찰을 요구한다.
“저 인간은 외로움조차 모르는 것이다.
영원히 결단코 모를 것이다.”
임솔아의 단단한 질문이 응시하는 겹겹의 모순과 위선
임솔아의 「제법 엄숙한 얼굴」은「체향초」를 중심으로 지하련의 소설 속 인물들이 지닌 다양한 얼굴들을 담고 있다. 강릉에서 에어비앤비 청소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국 동포 영애는 국적을 이유로 일터에서 계속해서 차별을 당하자 말투를 교정해 한국 사람처럼 보이도록 말하고 행동한다. 카페 사장 제이는 자신이 호주에서 인종차별을 받은 경험을 이유로 카페 창업 당시부터 중국 동포를 고용해야겠다고 계획 세우고 영애를 고용한 인물이다. 제이는 “당당하게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표준말을 쓸 수 있는 영애에게 채용 조건으로 연변 말로 서빙을 할 것을 요구한다. 또 다른 인물인 수경은 카페 협력 업체 직원으로 제이의 요구로 매일 카페로 미팅을 나와 제이가 자랑과 우울을 ‘토로’하는 것을 들으며 고통을 겪는다. 어느 날 영애는 수경으로부터 미팅 시간에 일부러 사무실로 들어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영애는 제이가 외로움을 털어놓는 순간의 모습을 목격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에 흔쾌히 응하고 제이의 우울에 대해 상상하며 자신이 지금껏 일을 하며 들어야 했던 자랑과 모욕 들을 떠올리게 된다.
제법 엄숙하지만 결코 진정한 외로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제이의 얼굴에서 우리는「체향초」의 오라버니와 태일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허황된 자랑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씁쓸한 열패감을 읽어낼 수 있다. 임솔아와 지하련은 모두 이들의 모순적인 내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들이 그러한 표정을 짓게 될 수밖에 없는 차별적 구조와 폭력의 근원을 파고든다. 우리는 이들의 소설을 읽으며 수많은 맨스플레인, 자랑과 모욕 들을 차례차례 연상하는 동시에 모순되면서도 진실한 얼굴과도 같은 현실을 찬찬히 마주하게 된다.
“그곳이 어디든, 지하련 작가가 더는
어느‘그늘’에 가려진 곳에 있지 않기를”
지하련은 마지막 소설 「도정」(1946)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발흥한 민주주의운동에 있어서의 양심의 문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한 작품”(‘해방기념문학상’ 후보작 심사평)이라고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였지만, 오랜 시간 잊혀왔다. 임솔아는 수록 에세이 「약간의 다름과 미묘한 같음」에서 “한 명의 작가가 그늘에 가려진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그의 글을 읽지 못하는 독자에게까지 그늘이 함께 드리워진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임솔아와 함께 지하련의 소설을, 그가 “‘그늘’에 가려져 있던 시간”까지 함께 기억하며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임화와 월북 문인이라는 그늘에 가려져왔지만, 우리는 지하련의 소설 속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엄혹했던 일제 말기, 해방정국에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또 좌절하기를 반복했을 지하련의 떳떳하고 맑은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이제 다시, 지하련은 과거 속에서 그늘진 채 잊혀온 작가인 동시에 스스로 지켜낸 아름다움만으로 형형히 빛나며 끊임없이 새롭게 읽힐 미래의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