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화성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대 국문과에 진학하였고, 잡지사 기자와 교사 생활을 거쳤다. 1990년 ‘KBS 방송문학상’에 중편 「강」이 당선되었다. 이듬해 『문학사상』 신인상에 단편 「하오」가 당선되고, 『세계의문학』에 단편 「빗소리」가 실리는 것을 계기로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동안 단편집 『빗소리』 『숭어』 『플라타너스 꽃』 『악보 넘기는 남자』를 냈고, 『초록빛 아침』 『체리 블라썸』 『아비뇽의 여자들』 『오로라의 환상』(전 2권) 등의 장편소설을 냈다. 단 한 권 낸 『내 친구 상하』라는 장편동화가 두 출판사를 옮기면서 도합 21쇄를 찍었는데, 소설 아닌 이 동화가 유일하게 살아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 소설에 매달려온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와 ‘내 옆사람’에 관심이 있으며, 메인 테이블보다 서브 테이블을 주목한다. ‘동물의 왕국’을 볼 때도 영양을 잡아먹는 사자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자 입으로 찢겨 들어가는 영양을 바라본다. 사물과 세계를 약자나 패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런 습관은 의도하거나 계산한 것이 아니라 생래적 체질 같은 것이다. 미숙아로 태어나 전후에 부실하게 성장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땡볕이 아니라 그늘, 그 안의 사람들, 서늘한 기류, 상처 속의 부딪침에 흥미를 갖는다. 요즘은 ‘나’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은, 작가의 가치와 시야로 굴절시키지 않은 원초적 인물과 인생을 궁리 중이다. 이 소설도 그 일환의 하나다.
출판사 서평
◆'사랑'을 꿈꾸는 남자 VS '우정'을 꿈꾸는 여자 그 엇갈리는 욕망의사회학
[체리브라썸]은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의 열일곱번째 작품으로 출간된 이청해의 신작소설이다. 문학평론가 김미현은 그녀의 작품세게에 대해 "사소한 것에 스민 기마나 징후들을 삶의 본질이나 숨겨진 폭력을 드러내는 데에 능숙하다"(김미현)고 말한 바 있는데, 다소 도전적인 테마를 다루고 있는 이번 작품 역시 미시적 탐구와 세밀묘사에 능한 작가의 노련미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남녀간에 사랑의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우정은 과연 가능한가?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비교적 명확하다. 사실 남녀간의 우정은 그리 새로울 것없는 테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일 배우자(또는 결혼을 전제로 한 이성친구)가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복잡 다단해질 수 밖에 없다. 불륜이라는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혼할 상대가 있음에도 순수한 우정을 나눌 또 다른 남자친구를 원하는 동희,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동희에게 사랑인지 욕정인지 모를 은밀한 감정을 품는 이혼남 도현.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을 전제로 한 위험한 계약이 맺어지는 순간, 그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시작된다. 사랑이냐 우정이냐를 놓고 벌어지는 그 미묘한 감정의 평행선을 작가는 섬세하게 더듬어나간다. 그러한 작가의 필치가 지루한 심리 묘사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그 사이사이에 양념처럼 각종 인류학적 사례들이 적절히 원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동희의 입을 빌어 아프리카 종족, 과테말라의 소수부족, 퀘이커교도 등 인류 사회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상적인 우정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들려준다. 결혼, 사랑, 우정에 관한 일반적인 통념을 일거에 허물어뜨릴 만큼 흥미진진한 내용들이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아마 카메룬의 방와족이거나 가나의 은제마족일거야. 그사람들은 배우자말고 다른 이성 친구를 누구나 평생 가져. 관습적으로, 그런데 어떤 줄 알아? 여자들은 자기의 이성친구와 같이 있을 때는 평소에 다른 남자들 앞에서 취하던 가식적인 태로를 풀고 서로 농담하고 솔질하게 말하고 심지어 식사까지 같이 해. 이들 풍습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특히 남편과 아내가 식사를 같이 할수 없거든. 이 이성친구들은 각기 결혼하고 나서도 편안한 우정을 계속해. 그러다가 부부 사이에 불화나 싸움이 벌어지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 질투같은 건 하지 않아. 사회적으로 묵인돼 있으니깐. 이상한 일은 절대로 안 벌어지지. 어때, 이상적이지 않아?"
그들의 어정쩡한 관계는 얼마 안 가서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 육체적 욕정에 사로잡힌 도현이 진짜 친구 사이라면 같이 밥을 먹는 것이나 섹스를 나누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논리로 동희에게 같이 잘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환상적인 하룻밤을 보낸 도현. 그러나 곧 진실을 알게 된다. 동희가 순순히 섹스에 응하고 정성으로 대해준 것은 어디까지나 진정한 우정을 맺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동희는 왜 그토록 남자친구와의 우정을 원하는 것일까? 그것이 단기 일부일처제의 단조로운 부부생활을 극복하기 위한 보조적 수단일 뿐이라면 그 의미는 반감될 것임에 분명하다. 작가의 시선은 더 먼 곳에 가 있다.
"남자끼리는 권력 지향적인 걸 만들어내. 여자들끼는 크고 넓은 것을 못 만들어내. 그렇게 선하고도 큰 것들은 혼성 우정이 만들어낸 거라니까!"
"이성 친구사이에는 확실히 활력 같은 게 있어. 오래 만나도 그렇다 말야. 동성 친구 사이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특별한 거야. 이런 생기나 활력이 남녀 사이의 믿음직스런운 우정이 아주 색다른 아이디어와 힘을 유발시키는 것 같아. 혼자서는 시도할 수 없는 것들을 탐색하게 하고 탐험하게 한다구."
사랑과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도현은 끝내 결론을 얻지 못한다. 일부일처제. 남근중심주의 신화가 지배하는 한국 현실에서 그만큼 남녀간의 순수한 우정 맺기란 지난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