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일기를 써야 하는 거지”
소설가 박서련의 일기이자 다소 뒤늦은 자립기,
세상 유일한 ‘내 편’이 되어줄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기록들
2018년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2021년 제12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고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등을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해온 소설가 박서련의 첫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201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등단 이후 작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걷는 동안의 일기들을 엮은 이 책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을 담은 ‘매우 사적인 글’이자, ‘다소 뒤늦은 자립기’이며, “일기만이 내 편”라고 말하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기록들이다.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는 ‘일기-여행기-월기’로 구성되어 일기라는 범주 내에서도 다채로운 형식의 글을 만나볼 수 있다. 괄호로 표현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과 인상적인 구절 등에는 별색을 사용해 읽는 재미를 더했다. 일기는 문자 그대로 하루의 기록이지만 이틀에 걸쳐 쓰이기도 하고, 며칠 동안의 소회를 적는 글이 되기도 한다. 일기의 형식도 길이도 제각각, 나 자신 앞에서 격식을 차릴 필요 없듯이 ‘자유로움’ 그 자체다.
월기는 달마다 쓰는 한 편의 일기이자 그 달의 인상적인 일이나 생각, 감정에 관한 글로, 가장 ‘최근 버전의 박서련’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이 여행기가 있다. 쇼핑과 미식과 불만과 피곤함과 소소한 웃음이 가득한 4박 5일간의 상하이 여행기다.
무엇보다도 일정한 기획이나 의도 없이 박서련 작가가 실제로 쓴 일기를 모았기 때문에, 더욱 내밀하고 진솔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친구들과 맛집이나 카페 투어를 하고, 사용 못해도 너무 ‘취향’이라 이상한(?) 소비를 하거나 등단 이후 처음으로 원고 청탁을 받거나, 새로운 사랑을 만나고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던 그간의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쓴 글 가운데 가장 재밌는 것이 일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에 실린 일기들은 한없이 우울해하며 나락으로 떨어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당당함과 유쾌함을 잃지 않는다. 외로워도 슬퍼도 작가는 기어이 내 눈에 ‘예쁜 걸’ 먹으면서 절망에만 웅크려 있지 말 것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어느 원통했던 날 밤, ‘아 내일은 이삭토스트 먹어야지’ 하고 다짐하며 잠을 청한 것처럼.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라고 하고 집 근처의 돈가스 가게에 갔다.
이 얘기를 하면 다 웃는데
그 집 돈가스는 예쁘다.
_본문 중에서
박서련
철원에서 태어났다.
소설을 쓴다.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짠 것처럼.
작가의 말을 대신하여
일기
이런 나라서 미안해
베들레헴의 인구 조사
모라토리엄
티라미수는 맛있기도 어렵고 맛없기도 어렵다
없었던 일로
소문 속의 나는 산 나보다 활력이 있어서 지금도 나보다 반보쯤 앞서 걷고 있다
*
Unsocialized party animal
사랑만이 살길이다 2.0
클리셰
조졌죠?
죽고 죽어 일백 번
And then fire shot down from the sky in bolts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첫눈 전후의 대략
스포일드 차일드
난 슬플 때 목욕을 해
전조
나도 사랑해
예후
웰빙
또 시작이니
완전히 글러먹은 아가씨
Previously in my life
안됐다
재밌는 얘기 좀 해줘
여행기
상해 여행기: 모사익의 모색
월기
부분적 시간 여행
사적 트리비아
꾀주머니
한번 가봅시다 동무의 숲
엉엉
소비일기: 반지편
비바 엘리자베스 뱅크스
이사 전야
프리비어슬리 인 마이 라이프 시즌2
알게 되겠죠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
하지만 누군가는 꼭 들어주었으면 하는 말
산문집의 첫 시작은 2021년 12월 1일의 일기이자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오랜만에 쓰는 일기”라는 고백과 함께 이런 말을 덧붙인다. “나는 일기가 아니지만 일기는 나니까.” 이처럼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일기들 가운데 마흔한 편의 글을 골라 펴낸 것이 이 책이다. 일기라서, 일기니까, 일기라는 이유로 가능한 속엣말과 외침들. 일기라서, 묘사와 설명은 더없이 디테일하다. 일기니까, 날것의 표현과 감정은 통쾌한 공감을 준다. 일기라는 이유로, 그러니까 실제 일기를 엮었으므로, 그 어떤 글보다도 박서련이라는 사람, 즉 ‘나란 존재’에 가까이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하고 좋아하는 마음 앞에서 주저하며 ‘문학 한다 한다’ 호언해놓고 글이 써지지 않아 좌절하면서도, 신기하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감탄할 기회를 노리고, 졸린 눈 비벼가며 구박도 받아가며 밤새워 게임을 한다. 미국 영화에서 혐오발언 일삼는 캐릭터 보고 탄식하는가 하면 애인 주려고 믹스 테이프 만들려다 다량의 자원과 시간을 갈아 넣기도 하고……. 어떤 면에선 내 모습이거나 내 친구 모습이거나 아는 언니 또는 동생을 닮은 것만 같은데. 이런 작가의 솔직하고 유별난 모습들이 그저 고맙기도 하고 마냥 재밌기도 하고.
나는 예쁘고 산뜻하고 재미있는 것들에 대한
나의 직관을 아끼는 사람이고
나는 내 기준에서 너무 벗어나 있고
나는 내가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
제일 싫은 건 이렇게 형편없으면서도 죽고
싶지 않은 너절함이다.
_본문 중에서
“나 대체 뭐 한 거야? 왜 이렇게 됐지?
……잘 모르겠다. 매일매일이 그런 일투성이다”
문장 형식도 눈길을 끈다. 다른 여느 문장보다 괄호와 말줄임표와 줄표가 많이 쓰이는 것도 특징이랄 수 있다. 차마 끝맺지 못하는 문장엔 마침표도 생략했다. 자유로운 형식에 담기는 자유로운 감성과 생각들. 괄호로 감춘 것을 드러내고 말줄임표로 못 다 한 마음을 보이며 줄표로 세밀하게 부연하면서, 그렇게, 작가는 뻗으면 잡을 수 있을 밀접한 거리에서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폴 오스터 『빵 굽는 타자기』의 첫 문장으로 산문집의 문을 열고 싶었다는 작가. “어떤 길고 어두운 시기를 지나온 사람이 그때는…… 그랬다, 하고 담담하게 줄여 말하는 심정”을 담고 싶었다고. 이 책의 글들은 데뷔 무렵부터 우리 앞에 ‘박서련’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작가로 자리 매김하기까지, 길다면 길고 어둡다면 어두울 시기의 기록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을 하면서 때론 실패하고 거절당하며 자격지심과 패배감의 누더기가 되는 마음이었을지언정, 즐거움도 기쁨도 친구들도 맛있는 음식도 동반했던 그 한 시절을 함께 겪어내는 듯한 뜻밖의 감동도 전해져온다.
지금 쓰는 이 소설을 내가 완성하길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세상이 원치 않는다고. 안 좋은 일들이 자꾸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러니까 오히려 끝까지 써야 하는 거야. 아무도 원치 않는 이 글을.
……그런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이기는 거란 말이죠. 글을 끝까지 쓴다는 건.
_본문 중에서
“정말 나도 참 나구나……
그 생각을 하니까 안심이 되어서 잠이 잘 왔다”
더 단단한 ‘나’로 곧게 설 수 있도록
매일을 쓰고 또 쓴다는 것
‘내가 왜 우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해줄’ 일기, ‘나의 나 됨을 감당하기 힘들 때’ 생각나는 일기, ‘이상한 일들을 맘껏 이상하게 여겨도’ 되는 일기, ‘맹목적으로 나를 긍정해주는’ 세상 유일한 내 편인, 일기. 더욱 단단한 ‘나’로 곧게 설 수 있도록 작가는 매일매일을 그렇게 쓰고 또 썼는지도 모른다.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을 기록하면서. 내일 다가올 시간들 속으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
잠시 멀어졌더라도 언제고 돌아갈 일기가 곁에 있기에 박서련 작가는 오늘도 한 발을 더 내딛는다. 이렇듯 작가의 옆에, 그리고 우리의 앞에 ‘일기’가 놓여 있다.
내 일기에서만큼은 이런 일들을 마음껏 이상하게 여겨도 되겠지.
일기 말고는 내 편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지나고 보면 더 그럴 것이다.
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