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즐기는 것이지 따지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시론은 이미 [시 읽는 기쁨] 1편에서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 그러나 1편이 시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 이번 2편은 더 나아가 시를 통한 '우리 시대 깊이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층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단지 시 자체를 즐기자고 유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이 시대의 단면들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다양한 시들을 통해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 숨겨진 참다운 자아와 세계의 상을 일깨운다. 그 속에서 진정한 연인 관계(이성선), 감동을 주는 대통령(임보), 햄버거 문화의 함정(오세영), 여성 차별의 질서(문정희), 파시스트적 가속도의 세계(이문재), 고독한 도시인의 자기정체성(김혜순), 인생 무상을 이겨내는 힘(이수명), 파멸로 치닫는 인간 문명(박용하) 등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는 '근원적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를 본다.
왜 푸른하늘 흰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밥이 가져다 준 스트레스가 가시는 듯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한경쟁 체제에 돌입하라고 선동하는 이 세속사회의 문법을 담담히 관조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날의 삶이 꽤 여유로워집니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생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심정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 오세영 _ 햄버거를 먹으며
사료와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먹이는 것과 먹는 것 혹은
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것.
사람은
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김치와 두부와 멸치와 장조림과……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이것저것 골라 자신이 만들어 먹는 음식,
그러나 나는 지금
햄과 치즈와 토막난 토마토와 빵과 방부제가 일률적으로 배합된
아메리카의 사료를 먹고 있다.
재료를 넣고 뺄 수도,
젓가락을 댈 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한 입 덥썩 물어야 하는 저
음식의 독재,
자본의 길들이기.
자유는 아득한 기억의 입맛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세영 시인은 사람과 가축을, 그리고 음식과 사료를 대비시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과 음식을, 가축과 사료를 서로 짝지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대비 구조 속에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행위라면, 가축이 사료를 먹는 것은 수동적이고 획일적이며 기계적이고 몰취향적인 행위라는, 그가 말하고 싶은 속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햄버거를 먹는 데 익숙해져가는 우리들은 가축처럼 변해가는 것인가요, 아니면 가축들을 닮아가는 것인가요? 오세영 시인은 인간이 가축처럼 변해가고, 인간의 삶이 가축의 그것을 닮아가는 현실 앞에서 우울해합니다. 그는 "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인간이고 싶고 그런 인간의 삶을 살고 싶은 것입니다.
** 조정권 _ 독락당獨樂堂
獨樂堂 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홀로 즐길 수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은 뙤약볕이 내려쬐는 여름날에도 견딜 수 있는 커다란 나무 그늘 하나쯤을 마음 속에 홀로 지니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의 광야에서도 견딜 수 있는 따스한 동굴 하나쯤 마련해가지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물질이 차고 넘치는데도, 친구와 하루 종일 전화통을 맞대고 온갖 언어를 쏟아놓았는데도, 컴퓨터에 열이 나도록 채팅방을 드나들었는데도, 저녁 내내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는데도, 승진하여 이사가 되고 사장이 되었는데도,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해 태양처럼 빛이 나는데도,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라고 도리질치는 소리가 여러분의 내부에서 들리거든, 한번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보십시오. 나는 진정 '홀로 즐길 수 있는 집', 곧 獨樂堂을 튼튼하게 마련했는가 하고 말이에요.
** 김병화 _ 내 피곤한 영혼을 어디다 누이랴
김병화의 그림시 <내 피곤한 영혼을 어디다 누이랴>를 보면서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생각을 합니다. 우선 우리가 살아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죽은 다음에도 그 영혼의 쉴 자리를 찾기가 결코 쉽지 않구나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지상의 방 한 칸을 얻기 위하여 수많은 시간을 안달하며 보냅니다. 오죽하면 『지상의 방 한 칸』(박영한)이라는 소설이 다 있겠습니까? 피곤한 영혼을 쉬게 할 아늑한 방 한 칸, 그것이 비록 작고 초라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략) 그러나 물리적인 방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의 영혼이 마냥 안온해질 수만은 없습니다. 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투쟁적인 삶의 세계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부대끼며 피곤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리적인 방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방을 마련해야 합니다. 물리적인 방도 방이지만, 진정 우리의 영혼을 쉬게 할, 마음의 방을 구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김병화는 <내 피곤한 영혼을 어디다 누이랴>를 통하여 쉼터를 찾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연민의 마음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