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한국 현대 시인 25인과의 아름다운 만남. 1985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활발한 문학평론을 해온 문학평론가가 쓴 현대시 평론서. 시를 더 구체적이고 진실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시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에 대한 더 자세한 이해와 정보를 제공한다. 무한이 부르는 소리, 무한에 다가가는 소리, 천상병의 <귀천>부터 말의 힘을 느껴보세요, 황인숙의 <말의 힘>까지 현대의 대표적인 시인들을 소개한다.
저자 소개
저자: 정효구
지은이 정효구는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및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1985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존재의 전환을 위하여』(청하, 1987), 『시와 젊음』(문학과 비평사, 1989), 『현대시와 기호학』(느티나무, 1989), 『광야의 시학』(열음사, 1991), 『상상력의 모험 : 80년대 시인들』(민음사, 1992),
『우주공동체와 문학의 길』(시와 시학사, 1994), 『20세기 한국시의 정신과 방법』(새미, 1997), 『몽상의 시학: 90년대 시인들』(민음사, 1998), 『한국 현대시와 자연탐구』(새미, 1999) 등이 있다. 현재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천상병, 서정주, 오규원, 정현종, 최승호 시인에서부터 함민복, 유하, 박세현, 신현림, 황인숙 시인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 시단을 수놓은 25인의 시와 시인의 일화를 담고 있다.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사람들이 어렵고 멀게 생각하는 우리 현대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나감으로써 독자들이 우리 시와 가까워지고 나아가서 자신의 마음속에 숨은 시심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시에 관심을 갖고 사랑한다는 것은 삶이 깊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다양한 단면을 다양한 시선으로 포착한 25인의 시세계를 저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노라면, 죽음까지도 아름다운 나라로 바꾸어놓은 천상병의 맑은 시심에 젖기도 하고, 저 멀리 섬진강에서 작은 시골학교 선생님을 하며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김용택의 섬진강 산그림자에 슬그머니 물들기도 하다가,
가난 때문에 아들에게 고기 한 점 사줄 수 없는 어머니의 애틋한 마음과 그 마음을 이해하고 두 모자에게 넌지시 따뜻한 정을 베푸는 식당 주인의 모습을 그린 함민복의 시에 이르면 코끝이 찡해진다.
또한 키가 1미터 90센티나 된다는 시인 유하, 법학을 전공한 시인 오규원, 요절 시인 기형도.고정희 등의 시인 이야기가 읽는 이들에게 우리 시인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이 책은 그래서 시 속으로 들어가는 25개의 오솔길과도 같다.
본문 중에서
좋은 풍경을 보여드립니다
정현종_좋은 풍경
늦겨울 눈 오는 날
날은 푸근하고 눈은 부드러워
새살인 듯 덮인 숲 속으로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
골짜기에 온통 입김을 풀어놓으며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
예년보다 빨리 온 올 봄 그 밤나무는
여러 날 피울 꽃을 얼떨결에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서 있었습니다.
― <좋은 풍경> 전문
위 시에서 아름답고 좋은 풍경은 눈 덮인 산 속으로 사랑하는 남녀 한 쌍이 올라가더니 밤나무에 기대어 사랑을 나누는 바람에 그 사랑의 숨결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만 밤나무가 봄이 온 줄 알고 얼떨결에 꽃을 다 피워놓고 서 있는 풍경을 뜻합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남녀의 “그짓”으로 주변에 열기가 피어난 것뿐인데, 아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밤나무는 그게 봄이 온 것인 줄 알고 꽃을 피워버렸던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과 그들의 온기와 그 가운데서 피어난 밤나무꽃 그리고 그들의 배경을 이루는 흰눈의 어울림이야말로 생명의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겠습니까. 정현종 시인은 정신의 근저에 생명사상을 깔고 있습니다. 그에게 시의 화두는 생명이에요.
그러니까 위 시의 좋은 풍경은 생명의 발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 시에서 돋보이는 또 한 가지는 아주 재치있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시인이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더니”를 “남녀 한 쌍이 올라가더니”로 표현했다면 성의 승화된 묘미는 반감됐을 것입니다. “밤나무에 기대서 그짓을 하는 바람에”라는 표현 대신 “밤나무에 기대서 키스를 하는 바람에”로 했다면 그 역시 원초적인 생명감의 시적 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죽은 후에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최승호_전집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겼다
― <전집> 전문
최승호는 위 시에서 조개가 죽고 난 후에 고작 그가 남긴 것이라곤 껍데기가 전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조개는 오직 죽은 후에 그의 몸을 감쌌던 껍데기 하나만을 이 우주에 던져놓고 사라집니다. 그에게는 껍데기만이 이 우주 속에 태어나 남기고 간 재산의 전부이자 흔적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자 애를 씁니다. 그것의 가장 적나라한 형식 가운데 하나가 전집을 묶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다른 인간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들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하여 전집을 묶는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 아니냐고 시인은 말하는 듯합니다.
오직 자연의 순환적인 고리 속으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돌아갈 수 있는 조개 껍데기 하나만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조개, 그 조개의 전집이라곤 바로 그가 남긴 조개 껍데기뿐이라는 사실이 허심한 삶의 아름다움과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사는 동안에는 세 끼의 밥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탐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후까지 무엇인가를 남기겠다는 탐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추하고 어리석은 삶인가를 시인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구슬이나? 불알이나?
오탁번_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 만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 <토요일 오후> 전문
오탁번의 시 <토요일 오후>에서 빛나는 부분은 그가 일상인의 작은 기쁨과 행복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사실 이외에 신화적 시간이라고 말할 만한 시간을 새로이 찾아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신화적 시간이란 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통합이 이루어졌던 시간을 뜻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몇 살 때까지 엄마 혹은 아빠와 목욕을 했습니까?
여러분들은 분명 엄마 혹은 아빠와 성의 같음과 다름에 관계없이 같은 목욕탕 안에서 목욕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시절까지를 인간사에 깃들인 '신화의 시간'이라고 규정합니다. 아빠인 오탁번은 딸과 가졌던 그 신화적 시간 때문에 무한한 행복을 맛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신화적 시간의 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딸이 커감에 따라 그들 사이의 신화적 시간에 금이 갑니다. 딸아이는 세속의 문법을 익히고 세속적 시간의 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빠인 오탁번의 토요일 오후가 무진장의 행복으로 가득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신화적 시간에 대한 추억이 토요일 속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그것은 신화적인 만남의 산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