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이 소설은 당신의 마음을 한껏 불편하게 할 것이다!
각자의 삶에만 몰두한 우리들에게 불어닥친 눈보라,
투명하고 서늘하게 당신을 되비치는 구슬 같은 눈들.
한국 소설의 새로운 바람 김휘의 첫 소설집
“어제도 오늘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순간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던 내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괴담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괴담이 되는 사회를 향한
광포하고도 고요한 눈들의 스펙트럼,
살아가고, 살아남기 위해 씨앗처럼 땅에 뿌려질 이야기들!
2007년「나의 플라모델」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한국소설의 신영토를 개척했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데뷔한 김휘 작가의 두 번째 책이자, 첫 번째 소설집 『눈보라 구슬』이 출간되었다. 첫 장편소설 『해마도시』에서 조작된 인간의 기억을 통해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그려낸 바 있는 김휘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실재와 환상, 악몽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들면서 독자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김휘의 소설은 한국 문학의 계보에서 닮은 누군가를 찾기 어렵다. 그보다는 비정하고 염세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영화나, 음산하고 암울한 분위기의 고스락(goth rock)이 먼저 떠오른다.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를 좇다 보면 레이몬드 카버가 스쳤다가도 휴지와 정적을 심어놓으며 김휘만의 사유로 우리를 이끈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 그녀가 보여준 일곱 편의 작품에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 세계의 지축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상상력과 주제의식이 대담하게 전개되어 있다.
김휘가 바라본 세상은 미스터리하고 해석 불가능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특히, 이 소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가 괴담이나 루머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은 곧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로도 귀결된다. 그리고 이 회의감은 곧 사유의 출발점으로서 ‘의심하기’라는 능동적 태도로 표출된다. 의심하기는 일단 사물과 현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김휘의 소설에는 아르고스의 눈처럼 ‘모든 것을 본다’는 눈이 등장한다. 그 눈은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인 개개인에게 일순간 불어 닥치는 눈보라와 같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맞으며, 그 안에 반짝이는 하나하나의 눈들을 발견한다. 그것은 구슬처럼 아름답고 영롱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모습을 동공처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섬뜩함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동공 같은 구슬의 한가운데를 용기 있게 바라보는 일이다. 이는 눈과 눈의 마주침처럼 소리도 형체도 없지만 우리의 영혼에 각인될 것이다. 김휘는『눈보라 구슬』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되비친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 출판사 서평
흘러가버린 시간이 현재를 다시 방문하는 희유의 순간,
온몸을 습격해오는 소름주의보가 발령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진다. 얼굴은 붉어지고 눈의 동공이 커진다. 침이 마른다. 근육이 수축한다. 소름이 돋는다. 모두 공포에 대한 신체적 반응이다. 우리는 김휘 소설집『눈보라 구슬』을 읽으면서 이와 비슷한 증상을 겪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신체적 반응이 더해진다. 마치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책장을 덮은 뒤에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온다는 것. 그것은 공포영화에서 단순히 공포스러운 상황을 관망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자신이 공포 그 자체인 현실로 무차별적으로 내던져지고 있다는 자각과도 통한다.
『눈보라 구슬』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공포는 외부적인 상황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공포다. 최근 대한민국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에 관한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기폭제가 됐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국가적 재난은 각종 부조리와 비도덕, 비윤리적인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뼈아픈 치부이지만, 그동안 은폐되어 온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를 죽음과 불안, 공포로 몰고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개개인의 행동과 도덕윤리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절망케 했다. 더불어 국민들은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연대책임이라는 소중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으며 모두 다 공범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공포란, 일상생활 속에 내재된 우리들의 어두운 본성을 발견할 때 더욱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김휘 작가의 소설은 현 시대가 안고 있는 상처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진정한 공포란 평범함 속에 내재된 악(惡)을 발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김휘 작가는 실재와 환상, 악몽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기묘한 괴담을 들려주며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다. 이 소설을 한낱 괴담이라고 치부해버린다면 독자들은 작가의 비범한 상상력에 놀라고 말겠지만, 괴담이 진실로 다가오는 순간에 이르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 세계의 지축이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실을 마주한 자에게 돌아오는 것이란 늘 그렇듯 상처뿐이다. 괴담은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선 헛된 망상에 불과하지만,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심리 속을 파고 들어가 교묘히 그들을 선동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인 괴물이 되기도 한다. 미스터리하고 해석 불가능한 사건들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작가가 들려주는 괴담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여지없이 뒤흔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화살이다. 화살이 꽂히는 과녁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가 괴담이나 루머로 이루어져 있다는 서늘한 공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공포는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의 평범성’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악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적인 행위의 일부분이며, 이러한 ‘무사유’를 빨아들이며 악은 번식한다. 작가는 이 책에서 ‘무사유’에서 비롯되는 우리 자신의 공포를 기억하고, 기록한다. 이 공포는 실체 없이 떠도는 괴담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김휘는 이 괴담에 얽히고설킨 진실의 실마리에 주목한다. 진실이 괴담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되고 축소되는 현실 사회의 메커니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은, 괴담이 진실이 되는 단 1퍼센트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환상 소설도, 추리소설도 아니다. 오히려 실로 진실이 괴담으로 치부되는 99퍼센트의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리얼리즘 소설에 가깝다.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가 아닌가!’
의심과 사유, 기만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생존법
이 소설집에서 작가는 ‘의심하기’와 ‘사유하기’를 기만적인 사회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는 생존법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괴담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현실을 재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곧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로도 귀결된다. 그리고 이 회의감은 곧 사유의 출발점으로서 ‘의심하기’라는 능동적 태도로 표출된다. 의심하기는 일단 사물과 현상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괴담 라디오」에는 의심이 많은 한 사람이 등장한다. ‘지구 지킴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이 소설가는 아내가 얼굴이 사라지는 병으로 죽은 뒤에 그 병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다. 그는 병의 정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전문가들의 말에 “정말이지 의혹을 떨칠 수 없”(85쪽)어서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자 움직인다. 공권력은 “안전하다는 지속적인 홍보”(83쪽)를 통해 현실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지만, 사내는 그러한 홍보에 가려진 참혹한 사태를 알리기 위해 인터넷 라디오라는 ‘틈새’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진실을 괴담으로 호도해버리는 이 상황에서 괴담 라디오가 유일한 틈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위험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건 안전하다는 지속적인 홍보 탓이지요. 이게 무서운 현실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각종 ‘괴담’들을 떠올리지 않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주장들을 한낱 ‘괴담’으로 치부해왔다.「괴담 라디오」는 이러한 부조리한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작품이다. ‘얼굴이 사라지는 병’이라는 환상적인 장치를 통해 이 소설은 ‘괴담’이라는 명명 아래 진실이 축소되는 메커니즘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또한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거대한 폭력의 메커니즘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악(惡)은 계속해서 힘이 세질 것이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알아차리고 빠져나오고자 하는 자들은 바로 의심하는 이들이다. 「감염」은 생명윤리를 위해하며 무리하게 진행된 정부지원사업인 생명연장 프로젝트를 소재로 삼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시한부 환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가 그들을 오히려 괴물같이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이 끔찍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정부와 언론은 괴물이 난입하여 환자들을 죽인 것처럼 꾸민다. <정체불명의 괴물들 소탕작전 불가피>라는 뻔뻔한 기사 제목은 언론이 어떻게 ‘말’을 폭력의 도구로 활용하는지 보여준다. 또한 사건 이후 깨끗하게 청소된 거리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힘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말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지 알려준다.
재활센터에서 제공된 의료와 재활서비스 덕분이라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던 자신이 그는 순간 섬뜩하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시선을 거둬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곁에서 지켰어야 했다는 자책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127-128쪽)
극중 인물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던 스스로에게 공포를 느낀다. 김휘는 이 구절을 통해 진정으로 끔찍한 것은 폭력적인 사태가 아니라 그 폭력적인 사태를 방치하는 ‘무사유’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능동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표면적인 사실들을 받아들일 때, 진실은 괴담 취급을 받을 것이고, 우리는 공범이 되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집에서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사유하기’이다.「아트샵」은 복제화가인 나를 통해 진짜와 가짜, 예술과 비예술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드러나는 단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복제화가로서, 위작을 밀반입하여 진품으로 속여 파는 일을 같이 하자는 선배의 유혹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배의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힘이 반대편에서 작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경호 사진가의 사진들이다. 사 씨는 “느릿하고 뭔가 사유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95쪽)로 자신의 예술관을 ‘나’에게 말한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사물 속에 얼마나 시간이 스며들어 있는가에 뭘 찍을지를 결정합니다. 그 시간은 마치 영혼처럼 자신을 응시하는 자에게 말을 걸죠. 제 사진이 선생에게 여행에 대한 향수나 감흥을 일으켰다니 기쁘네요. 시간이 존재라는 말이 실감난다니까요.”
“시간이 존재라. 저로선 매우 어려운 말이네요.”(96쪽)
사 씨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가 찍은 골목 사진을 보다가 시간이 말을 걸어오는 현상을 체험하게 된다. 짝사랑하던 여자가 외삼촌과 골목길로 사라지던 것을 바라보았던 시간, 여자가 떠난 뒤 골목길을 잊으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되살아나 영혼처럼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자신의 복제화에 빠져 있던 것이 사 씨의 사진에 있는 ‘영혼’이며, 외삼촌의 극장 간판 그림에 담겨 있던 ‘개성과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 씨의 사진을 바라본 체험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복제화를 영혼이 빠진 그림, 그러므로 “토사물”과 다르지 않은 그림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며, 선배로부터 걸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전화를 받지 않게 한다. 그렇다면 김휘의 소설에는 의심과 사유는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의심하기’가 주체의 의지에 의해 현실을 재구성하는 능력이라면, ‘사유하기’는 주체가 자기도 모르게 과거로 되돌아가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체험이라고 말이다.
영원히 타인의 삶에 연루된 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현실과 환상, 공포의 눈보라 속에서
반짝이는 진실의 파편 하나
「아르고스의 눈」에는 박제된 공작의 꼬리에 달린 여러 개의 ‘눈’을 본 뒤, 괴물의 ‘눈’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망상장애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김휘는 이 ‘눈’을 통해 ‘나’의 죄책감의 크기를 환상적으로 표현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작가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극중 인물을 죄의식 속으로 몰아넣으며 영원히 타인의 삶과 연루된 채 살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우리가 눈감아온 애매하고 불가피한 관계들에 눈뜨게 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자신도 모르게 공범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아이러니한 사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공포는 사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작가는 공포의 순간을 직면하고 진실에 접근할수록 커지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함을 역설한다. 의심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 사유하는 자만이 허구 속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 애써 감추어두었던 불안과 공포와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책장을 넘기는 우리의 손가락에 끈질기게 들러붙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부정적인 현실과 연루된 우리 자신의 검은 얼굴을 힘겹게 응시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김휘는 폭력적인 사태를 방관하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질끈 감는” 대신 “피투성이 광경”을 마주하며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라고 충고한다. 독자들은 작가가 보여주는 현실과 환상, 불안과 공포의 눈보라 속에서 반짝이는 진실의 파편 하나를 건져낼 수 있을 것이다. 때늦은 각오인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의심’하고 ‘사유’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