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인생의 어느 순간, 빛나는 것을 보게 되면 나머지 인생 동안엔
그 그림자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 것 같아. 일단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우리는 평생 그 아름다운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은 날카로운 첫 키스처럼
영혼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긴 문학의 아름다운 자장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작가 노재희의 첫 소설집!
당신은 ‘자기만의 고독’을 가지고 있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우리는 정말 고독한 것일까? 사실 우리는 고독을 잘 모르는 것이 아닐까? 바쁜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고독하다는 것을 느낄 시간조차 부족할지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고독해지는 법을 배워야만 고독해질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현대사회는 끊임없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은 사람을 섬처럼 자신의 방에 고립시킬 수는 있겠지만 고독의 뿌리 하나 심어주진 못한다. 심지어 당신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면 고독이라는 방의 평수는 더더욱 줄어든다. 그 틈을 비집고 노재희 작가가 지금 고독의 씨앗을 분양 중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머무를 고독의 방을 만들라고.
도대체 왜 우리가 ‘고독’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독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거의 모든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톨스토이가 “모든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르다”고 말했듯, 노재희 작가의 소설집『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에는 제각각 불행의 이유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고독의 중요성을 그려내고 있다. 어디선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우리 엄마일 수도, 직장 상사일 수도, 옆집 이웃일 수도 있는 평범한 우리네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 불안은 곧 불행으로 이어진다. 불안은 현대인의 질병이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고독의 부재함 속에서이다. 불행한 자들에게 노재희 작가는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각자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는 것.
고독이 사치품으로 전락한 피로사회에서
자신을 궤멸시키지 않기 위한 자기최면이자 각오,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노재희 작가의 소설집에는 저마다 어떤 이유로든 고독이 필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고독의 발명」은 무엇보다 고독을 원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 고독이란 우리에게 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독도 발명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품이 되어 팔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독만큼은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시인의 아내로 살게 해주겠다는 프로포즈로 결혼한 지 5년이 되었지만 변변한 시 한 편 쓰지 못하는 엄복태. 시인이 되고 싶은 회사원 엄복태는 매일매일이 괴롭다. 출퇴근시간마다 버스손잡이에 의지해 팔을 들어 올리는 삶이란, “자연스럽지 못하고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며 괜히 힘만 드는 인생”인 것이다. 고독 하나만을 원했지만 고독 하나만큼은 허락되지 않았던 엄복태는 자신이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가 고독하지 못해서이고, 그 이유가 고독을 느낄 만한 공간이 부재한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독하기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인지, 시를 쓰기 위하여 고독해지고 싶은 것인지 엄복태의 현실은 점차 무의미해진다.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는 익숙한 언어유희의 제목을 고독과 연결시킨 것이다. 샘소나이트 트렁크와 집 나간 아버지를 절묘하게 버무려 하나로 묶어낸다. 열세 살 때 헤어졌던 아버지를 찾으러 간 나는 멕시코에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낀다. 아버지가 아끼는 샘소나이트 트렁크에 아버지를 체포해서 넣어오겠다는 야무진 희망은 아버지를 만나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것. 아버지는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어머니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강요하는 성격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독을 채워줄 작은 가방 하나가 필요했을 뿐인데 가족들은 그것을 외면했고, 결국 집을 나간 아버지는 스스로 방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트렁크는 난파선 같은 인생에서 구명보트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결국 아버지를 ‘용서’하는 대신 ‘용납’하면서 다시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세계로 발길을 돌린다. 아버지의 세계를 완성시켜 줄 트렁크를 남겨두고 말이다.
밥을 안 먹으면 못 살잖아? 책은 안 읽어도 죽지 않지. 바로 그 점이 책의 매력인 것 같아.
사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당신 손목을 붙드는 그림자」에는 책 읽는 것에 매료되어 그 안으로 침잠해버린 어머니와 책을 숭배하는 박무석의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다. 늘 책을 가까이하던 어머니와 책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아버지. 그들은 너무나도 다른 종(種)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꾸만 자신의 공간으로 숨어버렸다.
<아라비안나이트>에는 자석산 옆을 지나던 목선 이야기가 나온다. 목선이 자석산 옆을 지나칠 때 목선의 못이 모조리 자석산으로 날아가 붙었다는 내용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석을 가지고 있다.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쳐내기도 하는 자석은 사람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무너뜨린다. 인간이 뭔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이것은 일종의 영혼의 끌림이다. 영혼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자장 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자기의 부속품 하나하나가 모두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 무너져버릴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자꾸만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쓸모없는 것인 줄 알면서도 쓸모없음에 빠져버린 그들은 자신의 고독 속에서 위안 받고 휴식하는 슬픈 인간군이다. 섞이지 못하고 따로 존재하는 개체들에게는 무엇보다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서로의 고독을 인정하고 지켜줄 때 우리는 다 같이 공존할 수 있다. 고독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따뜻하게 채워준다. 고독이라는 ‘쓸모없음의 유용성’은 관계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환영과 거짓의 세상에서 나를 증명하는 마지막 방법, 고독
「시간의 속」,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 「생활의 기술」은 관계 속에서 점차 고독해지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통증을 그리고 있다. 나를 알지 못하면서 타인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타인을 모르고서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우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두 세계가 공존한다는 암묵적인 합의이다.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면 더 천천히 가잖아. 내가 시간 속에 붙잡혀 있는 것 같았어.
나는 나의 시간이 세상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는 걸 알았지.
「시간의 속」은 서로 다른 시간들이 중첩되며 흘러가는 이야기이다. 인생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나는 1980년대에 시간이 멈춰버린 치매노인과 한 공간에서 살게 된다. 인간은 시간 속에 던져지지만 누구나 똑같은 시간을 사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느끼는 ‘시간의 속’이 다르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화분에게도 조용히 꽃 피울 시간이 필요하듯이 인간에게도 조용히 고독을 발명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의 속’은 고독하다. 그러나 ‘시간의 속’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성장한다. 서로의 ‘시간의 속’을 인정하는 것. ‘시간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시간의 속’을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마침표이다.
등단작인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는 관계 속에서만 증명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물과 함께 내려버린 자신의 삶, 사소할 것 밖에 없는 자신의 버스, 집, 가족들이 모두 사라졌다.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 진짜인지 가짜인지 헷갈리게 된다. 자신의 삶이 특별할 것 없이 지극히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졌으며, 그 사소한 것들로 인해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소한 것들이 발목을 잡는다. 차라리 어떤 큰 불행이 닥친다면 오히려 의연해질 수 있을 텐데,
늘 사소한 것들이 문제다. 그래서 생이 더욱 좀스러워지고 잡스러워진다.
소설 속 주인공 영환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환영(幻影)’이다. 영환을 거꾸로 말하면 환영으로 읽히는 것을 통해 인간세상의 의미가 보이는 그대로가 맞는 건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꿈인 건지, 사소한 의문이 꼬리를 물고 확장된다. 영환은 물과 함께 흘려보낸 자신의 삶을 찾는 여정에서 “우리 문 안쪽은 딴 세상인가, 아니면 이쪽이 딴 세상인가” 의아해한다. 자기를 증명해 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 누구의 남편 그리고 어느 조직의 누구로서 증명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분실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내가 분실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영환은 말한다.
「생활의 기술」에는 이 ‘쓸모없음’을 희망하는 한 남자가 ‘쓸모 있는 인생’을 강요당하며 불안에 휩쓸리는 이야기이다. 철학을 공부하다가 전업주부가 된 류는 살림살이부터 마트 장보기까지 모든 것이 불안하고 걱정투성이이다. 평안하고 싶은 류의 바람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질서화하려는 데서 오히려 삐걱거린다. 불안과 공포의 환영이 일상에서 조금씩 빠져나간다. 결국은 자신의 그림자가 자신보다 먼저 삶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현대 사회는 자꾸만 인간의 삶과 인간의 행동과 인간의 감정까지 숫자화하려고 한다. 이런 환산은 곧 가치를 반영하고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으로 양분된다. 그 사이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불안해하다 종국에는 불행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정작 자신의 고독을 발명하는 것에는 인색하면서, 자꾸만 남과의 비교 속에 자신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류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현대인들은 여전히 불안 속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다.
고독, 결국 우리 삶의 지표
나와 타인이라는 우리는 하나의 덩어리였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것은 없었다.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가진 개체였다.
우리는 소외될 때 불행하다고 느낀다. 꿈도 희망도 없이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불행의 지표는 관계 속에서 두드러진다. 남과의 비교 속에서 우리는 직장과 가족과 꿈, 심지어 자신의 존재마저도 소외당한다. 살면서 많은 시련들에 부딪칠 때 우리는 난파선 같은 인생에서 표류하고 떠다닌다. 그럴 때 흔들리는 우리의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건 고독이라는 닻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구명보트를 건넨다. 노재희의 소설은 잊혀져가는 고독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준다. 그 안에서 나와 비슷한 무수한 타인들을 만난다. 인간 사이에는 서로 닿을 수 없는 거리와 경계와 세계가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관계 속에서 서로가 불행하지 않게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관계 속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이 당연한 명제가 현대인들에게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고독할 시간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노재희의 소설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덧 고독의 그림자 안에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을 들여다본다. 내부는 조용하고 단단해진다. ‘고독’은 이제 ‘고요’로 바뀐다. 고독 속에서 ‘고요한 눈’이 떠지는 것이다. 중심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다. 바깥에 펼쳐진 일상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 떨어져 우리는 고요한 중심으로 가라앉는다. 멀리서 보면 비극인 것도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 된다. 세상을 사는 일이 울분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몸 하나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집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독은 우리의 집이고 울타리이고 보호막이다. 자신의 그늘 속으로 침잠하는 것, 고통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것,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 그 모든 것이 평안해지기 위함이다. 우리가 고독을 발명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이제는 정말로 고독해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