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났고, 한신대 국문과와 한신대 문예창작대학원을 졸업했다. 2006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중·단편소설 부문에 중편 「천사와 미모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독자적인 문제의식과 섬세한 언어의 조탁을 통해 신선한 소설 문법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로 이효석문학상 본심에 올랐고, 펴낸 책으로 소설집 『자정의 결혼식』, 장편소설 『헤밍웨이 사랑법』이 있다.
죄 많은 천사들의 도시, 필리핀 앤젤레스 시티에서 벌어지는
백전백태(百戰百殆) 진화 생존기
피나투보 화산폭발 이후 미군기지가 이주하면서 덜렁 유흥단지만 남게 된 이곳,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는 필리핀의 앤젤레스 시티. 제임스 박으로 통하는 나는 한국에서 사기를 당한 후 이곳에 들어와 자리잡은 지 10년이 넘었다. 대외적으론 한국대사관의 어시스턴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에게 사기를 쳤던 대니와 함께 한인들을 상대로 소소한 사기나 치며 생계를 연명하는 사기꾼이다. 어느 날 골프 부킹을 하다 한 노인과 아들 내외를 만난 나는 유산을 노린 며느리로부터 노인을 죽여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그녀가 제시한 사례금은 무려 35억!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이다.
나와 대니는 마침내 노인을 납치하는 데 성공하고 살인을 계획하는데, 자기는 작은 사기나 칠 뿐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다는 겁 많고 마음 약한 대니 때문에 계획은 번번이 난관에 부딪힌다. 게다가 이 노인, 뛰어난 입담과 운동신경, 임기응변까지 고루 갖춘 고수가 아닌가! 사고사로 위장하기 위해 야자수 밑에서 떨어지는 야자열매에 맞게 하기, 피나투보 화산의 호수에서 찢어진 보트에 태우기, 경비행기에서 떨어뜨리기, 옷을 홀딱 벗겨 사탕수수밭에 버리기 등 각종 기상천외한 살인 계획들을 실행에 옮겨보지만 그때마다 노인은 ‘빠레, 살라맛 뽀’(친구, 고맙네)를 연발하며 환호할 뿐 죽지 않고 살아난다. 급기야 노인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임을 당할 처지에 몰리고 마는데…….
“너 지금 삶이라고 했냐?
살과 삼 사이를 교묘히 발음하는…
나는 그 삶이라는 단어가 싫다!”
나는 사생아로 태어나고 가진 것이 없어 한국에서도 불법체류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다 쫓기듯 필리핀으로 이주했지만, 카지노 꽁지돈을 빌린 대가로 살생부 명단에 올라 있고 비자 문제로 이민국 직원에게 건네는 떡값이 자꾸 커지는 등 이곳에서 살아남기 또한 만만찮다. “한국이든 필리핀이든 ‘못 가진 자’는 똑같이 불행하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못 가진 자’였던 이 남자의 눈을 통해, 상부기관의 악을 볼 수 있게 되고 하층민의 피로를 볼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이렇게 어떠한 주의주장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려는 남자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사회풍자에 성공한다.”(정실비)
그러던 찰나 들어온 35억짜리 청부살인 제의는 나와 대니가 한몫 챙겨 한국으로 금의환향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노인을 쉽사리 죽이지 못하고 노인의 입담에 정신을 못 차리며 쩔쩔매더니 누가 인질이고 누가 인질범인지 모를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휘말린다. 노인에게 한식을 사다 주고 죽음을 애도할 시간을 주는 사기꾼들이라니!
노인은 두 사람에게 시종일관 ‘궁즉통’을 횡설수설한다. 더 갖으라 하지 않고 궁하면 통한다 한다. 이루라 하지 않고 비우는 게 더 큰 성공이라 한다. ‘가진 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살인꾼이 되기를 선택한 제임스 박에게, ‘비우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의 캐릭터는 처절한 생존의 과정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길 기대하는 작가의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태생부터 불법이었고 여전히 불법 인생을 살고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은 저버리지 않는 나와 대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들이 아직 괜찮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 수 있다. 둘은 다만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보호하는 연약한 미모사 같은 존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