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문학의 뉴웨이브를 이끌며 새 문을 열었던 백민석 작가의 중편소설
“내 어렸을 적 친구는 앵무새들을 키우며 살았네. 울타리도 없는 이상한 집에서.”
인공의 자연에서 나고 자란 인간의 성년식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편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되살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스토리텔링을 다시 선보이고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5편을 골라 특별판으로 출간하였다. <소설향 특별판>으로 출간된『죽은 올빼미 농장』은 1990년대 한국문학의 뉴웨이브를 이끌며 새 문을 열었던 백민석 작가의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아파트먼트 키드의 내면적 성장소설로, 작가는 ‘죽은 올빼미 농장’을 동원하여 아파트먼트 세대의 황폐한 내면을 보여준다. 죽은 올빼미 농장은 아파트먼트 키즈가 성년식을 치르는, 통과의례로서의 장이며 작가가 아파트가 곧 자연인 이 세대에게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차린 장소이다. 작가는 착각과 환상에 사로잡힌 ‘손자’의 죽음이 허물어져 폐허가 된 또 하나의 죽은 올빼미 농장이며, ‘인형’에게 조언을 구하고 ‘자장가’에 집착하는 주인공 역시 언제 손자처럼 자멸할지 알 수 없음을 암시한다. 주인공에게 죽은 올빼미 농장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존재는 대학 동창 ‘민’이이다. ‘민’은 주인공을 현실로 귀환시키는 영매이자 안정과 휴식을 상징하는 새로운 타입의 고향이다. 주인공과 30년을 함께해온 ‘인형’은 그래서 죽은 올빼미 농장의 들샘에 수장되고 만다. 세상에 대해 머뭇거리고 비껴가던 기형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주인공을 쉽게는 놔주지 않는다. 주인공은 터널을 빠져나오는 길 위의 택시 안에 있으면서 끝없이 어딘가로 달려가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백민석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소설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와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 『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러셔』 『죽은 올빼미 농장』 『공포의 세기』가 있으며, 미술 에세이 『리플릿』이 있다.
“그때는 거의 모든 게 황혼처럼 예뻤나?”
백민석 농장과 아파트먼트 키즈
아파트먼트 키드를 다루고 있는 백민석의『죽은 올빼미 농장』은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연이라는 고향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나고 자라나서 자기 자신만을 끌어안고 살아가지만, 정작 그 자기 자신은 보이지 않는 위험에 불과하다. 백민석은 이 소설에서 아파트먼트 키드라는 현대인의 전형이 겪는 서사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위험성에 일종의 경계 긋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위험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그 자신이라는 인식이다. 위험은 바로 인간의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을 서른 살이 되도록 갖고 있으면서 끝없이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은, 바로 그러한 위험을 폭탄처럼 끌어안고 있는 인물이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그 순간은, 끝끝내 지연되는 것이다. 아파트먼트 키드의 삶은, 고향의 부재라는 사실을 통해 이미 예고된 불행에 가깝다. 유아기의 아이들은 생애 최초의 감각들이 결락되면서, 유리창만큼이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내면으로 성장하게 된다. 주인공의 대학 동창 ‘민’은 쓰러져가고 허물어져가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 마음이 쓰이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실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자연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반복을 배우지 못한 물질기계의 도시문명 세대는 황폐한 공사 현장에서 그 이치를 비로소 배우는 것이다. 자연(nature)보다는 인공(art)의 세계가 친숙한 것이다. 백민석은 이러한 역설적인 설정을 통해, 인공적인 황폐 속에서 슬픔이 생겨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30년 만에 ‘죽은 올빼미 농장’에서 날아온 편지로 실존의 장소를 찾아가는 여정은 아이러니하다. 이 여행은 인형을 올빼미 농장의 들샘에 수장하고 오는 것으로 종결된다. 인형이란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옆에 있었던 것으로 퇴행적인 행동을 보이는 주인공을 통해, 백민석은 아파트먼트 키드가 진화된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미성숙한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결핍을 드러내는 이 소설은 내면의 탐색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낸다. 현실에 부재한 공간이자 철저히 내면적인 익명의 공간 ‘죽은 올빼미 농장’은, 백민석의 이러한 탐색을 ‘성년식’으로 상징해내는 하나의 거대한 비유인 것이다.
세계의 붕괴 속에서, 단절이 아니라 소외를 견뎌내면서
고독한 자신을 증명해낸 다섯 작가들,
소설향 특별판
무심하게 다가오는 작은 폭력의 힘(『숲속의 빈터』),
언어와 서사의 무의미(『하품』),
본능적인 감각의 유혹과 허기(『아주 사소한 중독』),
타락과 파괴에 대한 치명적인 숙명(『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성장 없이 치르는 성년식(『죽은 올빼미 농장』).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창작하는 신진에서 원로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이 쓴 중편소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내는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러한 출판 기획은 중편소설의 현주소를 정리함으로써, 장편과 단편으로 편중되어 있던 한국 소설의 구획을 갱신하는 동기가 되었다. 실제로 단편이라는 지루한 반복을 벗어나고 싶은 일탈 욕구와 장편이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피하고 싶은 부담감은 작가들의 창작에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향 시리즈를 통해 출현한 수많은 중편소설들은 단순히 출판 경향의 변화만이 아니라 소설 문학의 내적 변화마저 시도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최윤의 『숲 속의 빈터』, 정영문의 『하품』,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 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에 새로운 옷을 입혀 내놓는 것은, 소설향 시리즈의 현재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번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특별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다섯 편의 소설은, 인간의 말초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체제의 붕괴로 ‘개인’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던 현대인의 내면을 분석하고(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 말과 이야기가 가진 허위에 눈뜨기 위해 수 없는 무의미에 집착하는 ‘개인’ 속의 ‘개인’을 찾는 장르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정영문의 『하품』.) 또 정치와 사회와 이념의 무게에 짓눌려 외면해왔던 감각을 철저한 극단적인 폐허로 가는 파국(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혹은 감정과의 중독적인 관계(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로 드러내는가 하면, 일상의 사소한 변화가 주는 커다란 파문을 과거 역사와의 연결로 상징화(최윤의 『숲속의 빈터』)한다. 이처럼 다섯 편의 소설들은 각기 서로 다른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고 있으나, 저마다 역사의 이념적 무게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심리에 탐닉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만한 주요 한국 문학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