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임 문학의 새로운 서사적 실험을 시도한 중편소설
“장미는 말라갈수록 더 애틋하죠. 말라가는 냄새, 말라가는 색깔…….”
치명적인, 너무도 치명적인 사랑의 사소함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편소설의 의미와 가치를 되살려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단편의 미학과 장편의 스토리텔링을 다시 선보이고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5편을 골라 특별판으로 출간하였다. <소설향 특별판>으로 출간된『아주 사소한 중독』은 함정임 작가의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줄곧 생의 상처와 죽음의 상흔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탐색하고 그 상처의 치유를 위한 글쓰기의 도정을 보여왔던 작가 함정임이, 생의 가장 원초적 감각인 ‘혀’를 매개로 사소한 일상에 잠복해 있는 사랑의 치명적인 독성을 가벼운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형식과 스타일의 측면에서 함정임 문학의 새로운 서사적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다. 나아가 사랑의 상실과 고독, 혹은 소통 부재의 소외감이 진정 당신에게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닌지 묻는다. 주인공 ‘그녀’는 특급 호텔의 케이크 디자이너로 연하의 유부남과 불륜의 사랑에 빠져 있다. 혀를 통한 감각만을 맹신하는 ‘그녀’에게 먹고 말하는 데 사용되는 혀는 자신의 감각적 · 감정적 대상을 골라내는 데에도 유용하다. 작가는 소통의 방식을 고민하면서 관계의 소소한 단면에 빠져들어 중독되는 순서를 묘사하여, 사소함의 중독성에 숨겨진 상처의 위험으로부터 현대인들이 안전한지를 묻는다. ‘그녀’와 연하의 유부남 ‘그’의 사이에서 작가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부도덕성이 아니라, 교감하기를 바라지만 어쩔 수 없이 단절을 체험하고 마는 두 사람의 공허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현대성의 비극이다. 이 작품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이 비록 인공낙원이며 공중 정원의 세계일지라도, 사랑의 유한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아픔이고 상처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함정임
1964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장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밤은 말한다』 『동행』 『당신의 물고기』 『네 마음의 푸른 눈』 『곡두』 『저녁 식사가 끝난 뒤』가 있고, 장편소설 『행복』 『아주 사소한 중독』 『춘하추동』『내 남자의 책』이 있다.
“그녀가 유일하게 믿는 건 혀다. 혀가 짓는 말이 아니라 혀가 맡는 냄새다.”
말하고 맛보는 본능의 사랑, 관계의 허기에 중독되다
함정임은 혀라는 매개물을 통해 가장 원초적인 감각 중 하나인 미각과 그에 얽힌 소통의 의미를 다룬다. 혀에 대한 미신을 맹신하는 ‘그녀’가 연하의 유부남 ‘그’와 불륜의 사랑으로 관계 맺는 이야기『아주 사소한 중독』은 남녀의 사랑을 통해 욕망을 관통하는 관계의 가치와 의미를 묻는다. 이 소설에서 대화가 부족한 연인 사이를 채우는 것은 키스 혹은 케이크이다. 혀는 대화를 생략할 수 있게 하는 키스와 맛이라는 감각적인 경험으로 육체의 소통을 보여주는 매개체이다. 이것은 사랑의 단면이지만, 더불어 일상의 곳곳에 숨어 있다가 발견되는 족족 사람을 중독시키는 치명적인 본능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관계의 허기를 달래지 못하면서 오로지 혀의 감각만을 믿는다. 연하의 유부남 ‘그’와의 연애마저도, 그와 키스하고 대화하는 혀의 감각을 통해서만 미미하게 신뢰를 유지할 뿐이다. 요컨대 혀를 제외해서 보자면, 사랑은 ‘그녀’를 온전하게 설득해낼 수 없다. ‘그녀’는 오로지 혀의 감각을 통해 살아 있음을 영위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만남·사랑·이별에 관한 이야기로 쓰인 이 소설은, 감각에의 탐닉이라는 쾌락적인 명제 아래 관계의 본질로부터 도피하면서 관계에 대한 허기에 중독되는 인간의 유형을 농밀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렇듯『아주 사소한 중독』은 혀를 가운데로 놓고 두 남녀가 무감각하게 공존하는 것의 허무를 상쇄하듯 혹은 보상하듯 내밀한 본능의 쾌감으로 등치시킨다. 관계를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무거운 예감과 함께, 달콤한 케이크의 맛을 대비시키는 것이다. 케이크처럼 두 사람의 사랑이 커질수록 사랑의 공허함은 더욱 커지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소함이야말로 치명적이다. 관계의 상실은 그 고통을 메우기 위해 다른 것으로 대신하려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러한 반복의 과정에서 상처를 회복시킬 새도 없이 상처에 중독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함정임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관계의 본질을 떠나와 감각에 중독되어버린 현대인이 단절감을 통해 관계의 허기로 귀착되는 모습을 적시한 것이다. 마치 달콤한 케이크 맛에 중독된, 감각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혀가 중독된 감각은 곧 문명에 감염된 맛과 비슷하다. 중독된 혀의 감각이 사랑의 실패로까지 이어진다는 통찰은 사소한 일상에서 놓쳐버리는 중요한 것들을 다시 한 번 직시하게 한다. 원초적인 생의 감각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가장 진실한 순간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감각이라는 것이다. 원초적인 감각은 사랑의 본질을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에 중독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이 소설은 강조한다.
세계의 붕괴 속에서, 단절이 아니라 소외를 견뎌내면서
고독한 자신을 증명해낸 다섯 작가들,
소설향 특별판
무심하게 다가오는 작은 폭력의 힘(『숲속의 빈터』),
언어와 서사의 무의미(『하품』),
본능적인 감각의 유혹과 허기(『아주 사소한 중독』),
타락과 파괴에 대한 치명적인 숙명(『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성장 없이 치르는 성년식(『죽은 올빼미 농장』).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현장에서 활발하게 창작하는 신진에서 원로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들이 쓴 중편소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내는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이러한 출판 기획은 중편소설의 현주소를 정리함으로써, 장편과 단편으로 편중되어 있던 한국 소설의 구획을 갱신하는 동기가 되었다. 실제로 단편이라는 지루한 반복을 벗어나고 싶은 일탈 욕구와 장편이라는 무거운 중압감을 피하고 싶은 부담감은 작가들의 창작에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향 시리즈를 통해 출현한 수많은 중편소설들은 단순히 출판 경향의 변화만이 아니라 소설 문학의 내적 변화마저 시도하게 된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표적인 작품인 최윤의 『숲 속의 빈터』, 정영문의 『하품』, 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 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에 새로운 옷을 입혀 내놓는 것은, 소설향 시리즈의 현재적 의미를 재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번에 소설향 시리즈 중에서 특별판으로 다시 선보이는 다섯 편의 소설은, 인간의 말초적인 심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체제의 붕괴로 ‘개인’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던 현대인의 내면을 분석하고(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 말과 이야기가 가진 허위에 눈뜨기 위해 수 없는 무의미에 집착하는 ‘개인’ 속의 ‘개인’을 찾는 장르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정영문의 『하품』.) 또 정치와 사회와 이념의 무게에 짓눌려 외면해왔던 감각을 철저한 극단적인 폐허로 가는 파국(이응준의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혹은 감정과의 중독적인 관계(함정임의 『아주 사소한 중독』)로 드러내는가 하면, 일상의 사소한 변화가 주는 커다란 파문을 과거 역사와의 연결로 상징화(최윤의 『숲속의 빈터』)한다. 이처럼 다섯 편의 소설들은 각기 서로 다른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고 있으나, 저마다 역사의 이념적 무게 너머에 감추어져 있던 심리에 탐닉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시 읽어볼 만한 주요 한국 문학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