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날 동안 얼굴 붉히면서 살 거 뭐 있나.
같이 놀러나 댕기자”
거침없이 콸콸 쏟아지는 ‘썰’의 향연!
8년 만에 선보이는 김종광의 다섯 번째 소설집
소싯적 놀 만큼 놀아본 범골 어르신들이 건네는 노는 법의 진수
나들이하듯 가벼이 세상을 활보하는 그들이 ‘한 수’ 가르쳐주러
때 빼고 광 내고 행차하셨다!
김유정의 반어, 채만식의 풍자, 이문구의 능청스런 입담을 갖춘 작가로 평가받는 김종광의 『놀러 가자고요』가 작가정신에서 출간되었다.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짬뽕과 소주의 힘』 등의 소설을 발표하고, 청소년 및 역사 소설을 아우르는 등 폭넓은 행보를 이어온 그가 8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이다. 2011년에서 2017년까지 잡지 지면에 발표했던 소설들 가운데 9편을 수록한 이 책은 농촌 소도시를 배경으로 세련된 삶의 뒷전으로 밀려난 정답고 순박한 마음과 풍경들을 그려낸다. 특유의 걸출한 입담과 페이소스는 더 깊어졌고, 도시와 농촌, 노인과 아이, 표준어와 방언, 구술과 서술, 전설과 역사 등 대극점에 위치한 요소를 하나로 눙쳐 세계를 조형하는 기술은 더 노련해졌다. 어쩌면 김종광에게는 소설가라기보다 ‘썰’을 풀어내는 재담꾼 또는 만담가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눈물을 쏙 빼도록 웃기고 울리는 천상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 또한 역시 김종광이고, 참으로 김종광답다.
표제작 「놀러 가자고요」를 비롯해 「『범골사』 해설」, 「범골 달인 열전」, 「김사또」, 「봇도랑 치기」 등 『놀러 가자고요』 속 작품들은 대체로 김종광이 나고 자란 백호리 ‘범골’이라는 농촌 마을을 주된 배경으로 한다. 김종광이 그려내는 농촌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소위 ‘어르신’이라 불리는 노인들의 모습은 결코 쓸쓸하거나 쇠락한 느낌이 아니다. 농촌은 적당한 체념과 적당한 욕망이 공존하고 딱 그만큼의 활기와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그려지는데, 바로 이곳에 ‘진짜 어른들의 세계’가 있음을 김종광은 믿는다. 그리고 세계는 봇도랑 치기처럼 힘과 기술이 아니라 생의 요령과 끈기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곳임을 환기시킨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체득한 냉철한 현실인식과 낙관, 지혜와 여유. 살다 보면 놀러 가듯 가볍고 흥에 겨운 발걸음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김종광은 일깨운다. 세상을 다 안다고 확신하는 ‘꼰대’가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저절로 앎의 경지에 이른 ‘진짜 어른들’의 세계를, 그들의 역사를 김종광이 끈덕지게 되새김하고 기록하는 이유다.
지은이 김종광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공부했다. 1998년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로 등단했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해로가」가 당선되었다. 신동엽창작상과 제비꽃서민소설상을 받았다.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낙서문학사』 『처음의 아해들』, 중편소설 『71년생 다인이』 『죽음의 한일전』, 청소년소설 『처음 연애』 『착한 대화』 『조선의 나그네 소년 장복이』, 장편소설 『야살쟁이록』 『율려낙원국』 『군대 이야기』 『첫경험』 『왕자 이우』 『똥개 행진곡』 『별의별』 『조선통신사』, 산문집 『사람을 공부하고 너를 생각한다』 등이 있다.
장기호랑이
산후조리
『범골사』 해설
범골달인 열전
김사또
놀러 가자고요
봇도랑 치기
만병통치욕조기
아홉 살배기의 한숨
작품 해설 / 무방비로 방심하게 만드는_노태훈(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루하고 사소한 농민으로서의 삶을
경이롭고 기억할 만한 사건의 연속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_김종광
김종광의 소설에서 전설은 옛날 옛적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전설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도 끝없이 생겨난다. 백호리 사람들에게 “김연아보다 더 희망을 주는 전설”(196쪽)이 30여 년 전에 탄생하는데, 일제 때 저수지 바닥으로 던져진 150돈짜리 금송아지가 바로 그것이다. 황금 열풍 시대 서부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죄다 농사일 제쳐두고 ‘로또 당첨’에만 열 올리는 모습은 씁쓸한 미소를 자아낸다. 그렇게 전설은 깨고 나면 사라지는 꿈처럼, 손에 잡히는 희망처럼 삶으로 찾아든다.
전설은 ‘기록’을 통해 실체가 있는 ‘역사’가 된다. 그리고 역사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술이다. 「『범골사』 해설」에서 범골이라는 공간에 관한 서술의 역사를, 「범골 달인 열전」에서 범골인, 즉 모내기, 견인, 부업, 바둑 달인들의 내력을 펼치는 것도 ‘범골’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서술상의 책략이다. 작가는 왜 그토록 ‘범골사’에 집착하는가. 그 답의 실마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루하고 사소한 농민으로서의 삶을 경이롭고 기억할 만한 사건의 연속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332쪽)는 작가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버이를 바라보는 눈길로 현재와 과거를 두루 살피고, 한평생 소박하나마 충실하게 살아온 자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기억할 만한 사건으로 만들겠다는 다짐은 그가 추구하는 소설의 본령과도 닿아 있다.
“엄마 아빠가 공평하게 네 한숨을 나눠 가진 거야!
너, 인마, 너무 행복한 거야. 세상에 이런 가족이 어딨어?”
김종광은 자기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다. 충남 출신의 소설가 지망생 이야기를 담은 『71년생 다인이』가 그랬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그린 『짬뽕과 소주의 힘』이 그랬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별의별 것들에 대한 기록인 『별의별』도 자전적 체험을 담았다. 『놀러 가자고요』에서도 김종광 작가 본인과 가족들의 이야기가 슬며시, 때론 노골적으로 끼어든다. 「『범골사』 해설」에서 범골이 배출한 “듣보잡 소설가”(68쪽), 71년생 ‘소판돈’은 누가 봐도 김종광 작가일 텐데, ‘소판돈’은 ‘소를 판 돈’이란 뜻으로 실제로 집에서 소를 키웠던 경험과 일맥상통하는 이름이다. 「김사또」 「놀러가자고요」에서 심사가 뒤틀리면 낫 가는 소리를 낸다는 백호리 노인회장 ‘김사또’와 그런 남편의 성미를 적절히 이용하는 아내 ‘오지랖’ 또한 부모님의 모습이 투영되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장기 호랑이」, 「아홉 살배기의 한숨」, 「만병통치 욕조기」에서는 아들, 손자, 며느리가 총출동하여 구구절절 애틋한 가족애를 보여준다. ‘장기왕’이 되겠다는 열한 살 소년의 집념을 그린 「장기 호랑이」는 장기 모임에서 훈수를 견디다 못한 아들이 어르신의 면전에다 대고 쌍욕을 해댄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연신 사과를 하지만, 급기야 ‘퇴출’ 명령이 내려지자 마음속으로 ‘가자, 가, 더러워서 못 있겠다’고 아들 편을 든다. 「아홉 살배기의 한숨」은 제목 그대로 한숨 쉬는 버릇이 생긴 아홉 살 아이가 나오는데 갖은 애를 쓰다 ‘성장통’이란 진단을 받았지만 할머니는 굿을 벌이자고 성화다. 「만병통치 욕조기」는 ‘스파크 반신 욕조기’를 사고 싶다는 어머니와 말리고 싶은 며느리, 정장을 쫙 빼입고 나타난 세련된 외모의 욕조기 외판원 사이에 낀 아들을 통해 멀고도 험한 ‘효도의 길’을 그린다. 이들은 모두 어쩔 수 없이 팔이 안으로 굽는 “가족이기주의”로 똘똘 뭉쳐 있는데 그러기에 “서로의 한숨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가족(312쪽)이라는 뭉클한 자각이 뒤따른다.
-추우면 추워서 안 되고 더우면 더워서 안 되고
먼지 많아도 안 되고 바람 많이 불어도 안되고
비 맞아도 안 되고 딱 이맘때밖에 없어요.
-뭐라는 겨!
-놀러 가자고요!
표제작 「놀러 가자고요」는 노인회장 김사또의 조강지처 오지랖이 마을 주민들에게 ‘놀러 가자’고 전화를 돌린다는 내용이다. 열댓 차례의 전화 통화를 통해 인물들 저마다의 곡절 있는 사연들이 지문 없이 대화로만 이루어진 '육성'을 통해 한상 푸짐하게 차려진다. 기껏 놀러 가자고 전화했더니 “안 들려요, 안 들려!”만 연신 외쳐대는 팔순 노인부터 자식 놈 사업 쫄딱 망해 집안이 풍비박산 된 사람, 팔구십 노인네들이 버르적버르적 기어 다녀봤자 단체로 고려장 왔다는 소리만 듣는다고 타박하는 사람, 죽을병에 걸린 판국에 놀러 가는 게 대수냐면서도 틈만 나면 수작을 거는 국민학교 동창까지, 30명 정원의 대관 버스가 텅텅 비는 일 없도록 방비하고픈 오지랖 여사 마음과 달리 “하늘이 무너져도 놀러 가겠다”(116쪽)는 확답을 주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 “놀러 가는 거에 환장한 것처럼 방방 떨고서는 못 가? 가자고 지랄을 떨지 말든가”(133쪽)라고 구시렁대는 김사또의 말처럼, 그토록 놀고 싶어도 세상살이, 사람살이에 치여 놀지 못하는 사람들 천지다.
놀러 가는 게 뭐 별건가. 그저 친한 사람들끼리 좋은 것 보고 맛난 것도 먹으며 휴식을 갖자는 거지. 김종광은 1년에 한 번, 그것도 논갈이 끝나고 못자리하기 전 잠시 한가할 때 노는 것도 이 눈치 저 눈치, 이 사정 저 사정 다 고려해야 하니 말은 쉬워도 막상 실천하려면 어려운 게 바로 ‘놀러 가는 일’임을 보여준다.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그래서 더더욱 놀러 가자는 일념으로 가득 찬 범골 사람들 이야기는 꾸역꾸역 살아가는 소시민의 고충과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진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김종광은 노는 기술이 곧 삶의 기술임을 간파한다. “얼굴 붉히면서 살 거 뭐 있나, 같이 놀러나 댕기자”(95쪽)는 범골 어르신의 말씀처럼, 살면서 그리 심각할 것도, 좌절할 것도 없다. 생의 유한함 앞에 인간은 누구나 스러져가고 잊혀져가는 존재다. 낡고 오래된 것들의 연대라는, 보다 넓은 범주에서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서로 피를 나누진 않았어도 ‘한숨’을 나눠 가질 수 있는 가족 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러니 긴장 풀고, 걱정 내려놓고, 같이 세상을 활보하자. 나들이하듯 가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