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은 잠기고 모든 이는 잠들었으리
깊고 검은 웅덩이는 뒤뜰에 있고 치어들은 어항에서 자라네
깨어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이리”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
경계인이자 주변인으로서의 실존적 고독감을 그린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 작가 임재희의 애도 소설집
2013년 첫 장편소설 『당신의 파라다이스』로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작가 임재희의 소설집. 한국인 이주민들의 신산한 삶을 묘파한 임재희의 세 번째 작품이자 첫 번째 소설집이다. 그동안 임재희는 구한말 조선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 『당신의 파라다이스』에서 사탕수수 집단농장에서 펼쳐지는 네 남녀의 엇갈린 운명을 그려내 “한국 이민소설 장르의 새 장을 여는 이정표”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두 번째 장편 『비늘』에서는 소설을 쓰는 삶과 그 시간에 대한 고뇌와 그리움을 통해 글쓰기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었다. 강원 철원에서 군인의 딸로 태어나 21세 때인 1985년에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그녀는 스스로 “미국인과 한국인의 중간에 선 ‘경계인’”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영어로 의사소통은 하지만 거기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으며, “한국어는 정서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에서 작가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민자인 서술자를 내세워 이국적이고 낯선 삶의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내면서도, ‘미국으로 간 이민자’,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자’, 그리고 ‘한국에서 사는 한국인’이라는 세 부류의 인간형을 통해 ‘경계인’ 또는 ‘주변인’의 개념을,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 사람들까지로 확대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이 경계인 또는 주변인에 대하여,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된 자들에 국한하지 않는다. 어느 한곳에 정주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떠도는 그들을 통해 구획된 장소 너머의 공간에 대해 사유하는 힘을 지닌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한국도 미국도 아닌 현재 서 있는 곳”이 결국 내가 존재하고 있는 곳이라는 실존적 자각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임재희
196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미국 하와이주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와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당신의 파라다이스』로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고, 장편소설 『비늘』과 옮긴 책으로 『라이프 리스트』 『블라인드 라이터』 등이 있다.
히어 앤 데어(Here and There)
동국
라스트 북스토어(The Last Bookstore)
천천히 초록
로사의 연못
분홍에 대하여
압시드(Abcd)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로드
작품 해설 / 허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하루 같았다.
홀가분해야 되는데 되레 너무도 많은 것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에는 미국에 살거나 머물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한국적인 것을 찾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 머물러 있지만 한국 사회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어느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방황하지만 끊임없이 한국과 결부된 과거를 환기하고 한국인 또는 한국적인 것들과 교감을 나누려고 한다. “폴은 그런 사람들과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 이들에게 한국적인 것은 어떤 기호로 나타나든 기어이 와 닿는다.
한편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미국적인 것을 떨쳐버리지 못해 한국에서 생활하는 데 위화감을 느낀다. 특히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된 사람들은 왜 여기에 다시 왔고, 왜 여기를 다시 떠나느냐는 질문을 수차례 받는다. 「히어 앤 데어」에서 동희는 그때마다 “단답형의 대답”을 찾아보려 하지만 이민과 귀환의 연유를 명쾌히 밝히지 못한다. 문제는 그런 질문은 그저 질문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집요하게 묻는 사람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잠시 흥미를 끌다 사라지는 가십거리처럼 “자기 삶의 잣대로 듣고 이해하고 개입하고” 싶어 했을 뿐. 그럼에도 이들이 한국에서 살기로 결정을 내리는 이유는 자신의 근원에 접속하려는 열망 때문이다. 지난날의 기억과 뿌리를 자기 삶과 접합시키려는 노력, 그런 의미에서 임재희 작품 속 등장인물이 향해가는 길 위의 여정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근원에 가 닿으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더라고.”
떠나는 자, 돌아온 자, 머무는 자들이
자신의 근원을 향해가는 여정
임재희의 소설에는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도 등장한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것은 무난해 보일지 모르나 거기에도 난관은 많다. 「동국」의 주인공인 동국은 비극의 한복판에서도 한 핏줄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까지 외면당한 채 기댈 곳 없이 살아간다. “친척들은 옷자락 끝에라도 불행의 씨가 묻을까 작은 엄마를 멀리했고 작은엄마는 그들로부터 스스로 멀어져가는 방법을 택하며 자존심을 지켰다.”(「동국」)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상호 도움의 공동체를 기대하지만 이는 애초부터 제대로 기능했던 적이 드물다. 이 지점에서 작가 임재희는 다른 길을 모색한다. 상황과 주어진 역할에 의해 변화하는 나의 정체성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변하지 않는 실존적인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표제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을 비롯해 「분홍에 대하여」, 「동국」 등의 인물들은 떠나는 자, 돌아온 자, 머무는 자, 세 부류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이들은 떠나도 떠나는 것이 아니며, 돌아와도 자신의 발끝이 공간에 뿌리 내리는 것도 아니다. 한국, 미국, 또는 그 밖의 다른 국적 소속이라는 레테르가 붙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에서 형성되는 껍데기일 뿐이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를 느끼고, 자의 또는 타의로 동질감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렇게 세상에 속하지 못한 채 홀로 남겨질 때, 나는 어디에 속한 누구인지,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가 닿는다. “어디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어디에서 죽느냐의 문제더라고. 체류 기간 2년 동안 잘 생각해봐요.”(「히어 앤 데어」)
어느 곳에 속하지 못한 자들이 끊임없이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것은 필연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라다이스가 생존의 장소가 되어 그 빛을 잃고 나면, 그들은 또다시 새로운 파라다이스를 꿈꿀 수밖에 없다. 이편에 있으면서도 없고, 저편에 없으면서도 있는 장소. 파라다이스, 즉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말임을 새삼 떠올리지 않더라도, 임재희가 ‘실체화’된 파라다이스에 들어가는 일이 영영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지금 여기 있는 ‘나’를 살아가게 할
애도 의식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
임재희는 자신의 첫 장편 『당신의 파라다이스』의 집필 이유로 “아무런 흔적도 없이 한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의 한 방식”이라고 밝힌 바 있다. 작가로서의 첫 걸음이 애도였고, 그 애도 행위는 이번 소설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폴의 하루』에서도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애도는 사라진 대상을 추모하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임재희의 소설에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상실의 충격을 자기 안에서 서서히 완화하는 과정 자체를 말한다. 허희 문학평론가는 이를 두고 “애도할 타자를 이곳으로 불러와 애도하는 주체와의 공유 지대를 만들어냄으로써, 지금 여기 있는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의식”이라고 정의 내린다. 산 자와 죽은 자, 지금 여기 없는 자와 있는 자 모두를 위한 이 애도는 작가 자신을 포함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던 운명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의식인 것이다.
이처럼 임재희는 삶의 목적은 가시적인 목표의 달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곳을 향하는 도정에서 어렴풋하게 포착될 수 있는 것임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폴의 하루』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들로서 예증하고 있다. 한 시대를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살다 간 사람들, 그리고 이곳에 남아 계속 살아가려는 사람들 모두에 대한 작가 임재희의 애도는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