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윤기(1947~2010) 8주기 추모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탁월한 번역가, 신화 연구가
이윤기 다시 읽기
“내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종이었다.
내 어머니는 그 아버지의 종이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탁월한 번역가, 신화 연구가, 고(故) 이윤기 작가. 작가정신에서는 이윤기 작가 타계 8주기를 추모하여, 그가 생전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펼쳐온 소설, 에세이, 인문(신화)의 세 분야의 대표작 3종(『진홍글씨』, 『이윤기가 건너는 강』, 『이윤기 신화 거꾸로 읽기』)을 개정하여 출간하였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각 작품에 실린 의미를 현대적이고 미니멀한 감각으로 재해석하되, 이윤기 작가의 전방위적 사유와 인문 정신이 오롯이 담긴 표지와 판형으로 재단장했다.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의 세계를 남성 작가로서는 이례적으로 파헤치고 고발한, 선구적인 페미니즘 보고서 『진홍글씨』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조화’라는 미명으로 존재하는 균형이 기실 허위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낸 작품이다. 첫머리에 “‘A’는 ‘간음Adultery’의 두문자 ‘A’가 아니다. ‘A’자는 ‘아마존Amazon’의 두문자 ‘A’다”라는 자기반성적인 논리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유방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선입견을 제시하는 초반부를 필두로, 삶에 숨어 있는 문화적·신화적 상징들을 분석해나감으로써 이 세계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철저하게 까발린다. 나아가 급작스러운 파국을 제시함으로써, 여성에게 유달리 더 섬세하고 사려 깊은 남성조차 기존의 양성 간 불편등한 섹슈얼리티 착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성의 물리적 폭력만 없으면 여성억압이라는 현실이 가려지리라는 허위의식을 꿰뚫고, 문화적·관습적으로 뿌리깊이 자리잡아온 상징들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것이다. 다수의 페미니즘 소설들이 등장한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 이윤기 작가가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윤기(1947~2010)
소설가이자 번역가, 신화학자. 1947년 5월 3일 경상북도 군위에서 출생하여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성결교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1991년부터 2000년까지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종교학·문화인류학 초빙연구원과 객원교수를 지냈다. 번역과 문학에 헌신해온 이력을 인정받아 2005년 5월에는 순천향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장편소설 『하늘의 문』 『햇빛과 달빛』 『뿌리와 날개』 『나무가 기도하는 집』 『그리운 흔적』 『내 시대의 초상』, 중편 『진홍글씨』, 소설집 『나비넥타이』 『두물머리』 『노래의 날개』를 발표했으며, 그 밖에도 신화교양서 『이윤기 신화 거꾸로 읽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꽃아 꽃아 문 열어라』와 역사교양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산문집 『이윤기가 건너는 강』 『어른의 학교』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우리가 어제 죽인 괴물』 『무지개와 프리즘』 『위대한 침묵』 『시간의 눈금』 『내려올 때 보았네』 등 다양한 책들을 저술했다. 또한 그리스 신화를 해석해 소설화한 『뮈토스』를 펴내기도 했다.
번역가로서 왕성히 활동하여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돌의 정원』 『미할리스 대장』,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로마의 여자』,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 도나 타트의 『비밀의 계절』,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지프 캠벨 · 빌 모이어스의 『신화의 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종교의 기원』, 칼 구스타프 융의 『인간과 상징』, 진 쿠퍼의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샤마니즘』 등 소설에서 연구서까지 250여 권에 이르는 다방면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동인문학상(1998)·한국번역가상(2000)·대산문학상(2000)을 받았으며, 2010년 8월 27일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작가의 말
진홍글씨
작품 해설
남성 작가 최초로 여성 억압적 현실을
문명사적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는 문제작
이윤기 작가는 번역가이기에 앞서 소설가였다. 그는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비록 수백 권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계의 거목으로 자리매김하였으나, 본령은 늘 소설이었다. 이윤기 작가는 43년의 창작 인생 속에서 꾸준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작품을 썼다. 그는 굵직하고 웅숭깊은 소설들을 선보여, 동인문학상·대산문학상을 받으며 그 세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소설 세계는 신화와 문화라는 양면으로 단단하게 지어진 요새와도 같았다. 이윤기 작가는 ‘여성’의 문제에 누구보다도 밝고 깊은 눈으로 천착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신화와 문화 읽기에서 비롯되었다. 신화를 통해 역사를 읽어냄으로써 당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미래의 새로운 문화를 예견하는 혜안을 길러낸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신화와 문화를 공부해온 자신만의 결론을 밝힌다. “남성만이 할 수 있던 일, 여성은 도저히 할 수 없던 일”이 줄어가고, “여성만이 할 수 있던 일, 남성은 도저히 할 수 없던 일”이 줄어가고 있음을 언급함으로써, 남녀동권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정신이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의 조짐을 감지하지 못하는 사태”를 안타까워하며, 불화의 책임이 온전히 “치사한” 남성에게 있음을 지적한다.
1998년 이 세상에 나왔던 『진홍글씨』는 바로 그러한 통찰력의 결실이었다. 여성을 억누르고 재단하는 일방적인 폭력의 세계를 남성 작가가 직접 파헤치고 고발한, 선구적인 페미니즘 보고서였던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다수의 페미니즘 소설들이 등장한 최근 몇 년을 돌아보면서, 『진홍글씨』를 읽으면 이윤기 작가가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선견지명을 진즉에 보여주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홍글씨』가 처음 발행되었던 스무 해 전과 요즈음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독자들은 지금 여기서 성찰해볼 만하다.
문화인류학·신화학의 만남으로 풀어낸,
남성과 여성 사이의 ‘조화’라는 허위에 대한 탐구
『진홍글씨』라는 제목을 보면, 한눈에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왔음을 알아챌 수 있다. 남성 젠더의 폭력이라는 죄업을 한 자 한 자 새긴다는 의지에서 의도된 이 패러디의 제목을 넘겨보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조화’라는 미명으로 존재하는 균형은 기실 허위에 불과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작가의 그러한 자기반성적인 논리를 독해해냄으로써,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사람들 앞에다 이마를 들이댈 수 있다. 들이대고는 내 이마에 진홍글씨 한 자를, 새길 테면 새겨보라고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핏빛 ‘A’자를, 크고 선명하게 새겨보라고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A’는 ‘간음Adultery’의 두문자 ‘A’가 아니다. 나는 하지 않았거니와 설사 했다고 하더라도 이 ‘간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 혼외의 사랑이 한편에서는 한량의 파격으로 미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간부姦婦의 패덕으로 매도되는 이 불공정한 시대의 성적 교섭 환경에서는 ‘간음’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남성과, 남성이 주도하는 지배계층 언어 간의 간음을 통하여 생겨난 사생아일 뿐이다.
‘A’자는 ‘아마존Amazon’의 두문자 ‘A’다. 아마존은 남성의 종노릇을 거절하고 무리지어 여성만의 모듬살이를 꾸몄던 것으로 전해지는 고대 여인국女人國의 여전사들이다. ‘아마존’은 ‘젖이 없는 여인들, 무a 유방mamos 여인들’이다.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 활 쏠 때 시위에 걸린다고 오른쪽 젖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오른쪽 젖이 없었단다.
주인공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주홍글씨』와 전혀 다른 궤도로 역사가 흘러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A가 간음(Adultery)의 이니셜이던 『주홍글씨』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아마존의 이니셜이어야 함을 힘주어 말한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처럼 낙인찍히기를 거부하고, 결연히 자신의 오른 젖을 잘라버리는 희생의 자립을 택한다. 남성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스스로 삶을 결정짓는 아마조네스를 동경하고 딸들이 그런 삶을 살기를 기원한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초반부와 종반부에 두 차례 반복되며 결연히 강조된다.
내 세대 자매들과 다음 세대 딸들에게 써서 남긴다.
이와 같이 구세대 여성의 당당한 유언이 놀라울 뿐 아니라, 남성 캐릭터가 그전까지의 페미니즘 소설에서의 그것과는 달리 매우 독창적이라서 이 소설은 더더욱 빛난다. 문학평론가 류보선은 해설에서 작품 속 ‘남편’을 두고 “이제까지 여성 문제를 다룬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흥미로운 인간형”이라고 평한다. ‘남편’의 경우 “일상적인 폭력을 일삼거나” 혹은 “권위를 강요하는 독재적이고 독선적인 성격”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소설이 “남성의 폭력 그 자체를 너무 부각”시키고 “남성의 폭력적인 구조를 절대화”하는 등 폭로하는 고발을 넘어, 현실에서는 더 교묘한 방식으로 폭력이 내재화된다는 입체적인 모순을 빚어내는 표현력을 선보인 것이다. 『진홍글씨』에서 ‘남편’은 당대의 다른 페미니즘 소설들이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캐릭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최근의 페미니즘 담론에서야 ‘깨어 있는 남성’의 교묘한 모순을 다루기 시작했는데, 『진홍글씨』는 선구적이게도 무려 20년 전에, 주인공 ‘나’의 조언자로 등장한 ‘남편’이 적대자로 격변하는 과정까지 보여주면서 ‘깨어 있는 남성’이라는 캐릭터를 역동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나아가 주인공 ‘나’는 ‘밈시 헤스터’라는 여성인물을 통해 더 뚜렷한 심리적 입체감을 얻는다. ‘밈시’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나’와 같은 여성이지만 여러 외국어를 섭렵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데다가 중국인과 한 차례, 일본인과 한 차례씩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는데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주체적인 인물이다. 보수적인 한국의 가정에서 나고 자라나 불평등한 성 착취 구조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나’와는 매우 다르다. 이로 인해 ‘나’는 ‘밈시’에게 불가사의한 경계심을 갖게 된다. 이는 ‘밈시’와 ‘나’ 모두 명예남성 또는 코르셋의 혐의를 만드는 소설적 장치로 작용한다.
야, 우리 집에서 나보다 더 암내를 피우는 법이 어디 있어? 나보다 더 ‘암컷성’을 자랑하는 법이 어디 있어?
소설 속 ‘밈시 헤스터’는 주체적인 삶을 산다는 점에서 주인공 ‘나’의 대칭점에 있다. 이름부터 『주홍글씨』에 나오는 ‘헤스터 프린’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주홍글씨』의 성 착취 구조에 대한 비판적 패러디를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주홍글씨』에서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헤스터 프린’이 간통(Adultery)의 A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진홍글씨』에서 남편은 아내인 ‘나’를 두고 예상외의 다른 여자와 결국 간통을 저지르지만 A를 가슴에 달고 살아가는 형벌 따윈 받지 않는다. 그 누구로부터 낙인찍히지도 않는다. 그것은 남편이 ‘나’를 비롯한 여성의 편에 서는 교묘한 방식으로 남성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할 만큼 치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패러디는 17세기 미국을 배경으로 한 『주홍글씨』와 현대 사회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간통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남편의 머리를 벼루로 내리친다. 뜬금없는 파국의 결말에 독자들은 당황할 수도 있으나, 독자들로 하여금 나머지 결말을 뒤잇게 하기 위한 의도된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각별히 문제가 있어서 남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양성의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여성을 편드는 척하며 오히려 간통으로 기만한 남편을 징벌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남편의 죄를 남편에게 낙인찍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몸에 새긴다.
신체의 일부에다 글씨를 새기는 저 자자형刺字刑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위협했던가? 하지만 이제 나는 이마를 내밀고 자자형을 받겠다. 이제는 자자형도 내게는 위협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마를 내밀고 요구한다. 내 이마에 핏빛 진홍글씨로 자자刺字하라.
이로써 제목이 ‘진홍글씨’인 까닭은, 종반부에 이르러 초반부의 암시가 살아나면서 비로소 밝혀진다. 우연히 마련되어 있던 벼루에는 남편의 죄를 기록할 수 있는 검은 먹물이 담겨 있었기에, 그 검은 먹물이 남편의 붉은 피와 뒤섞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새기는 주체와 대상은 모두 여성 자신이다. ‘나’는 그 때문에 자매들과 딸들을 위해 이 기록을 써서, 제 몸에 새겨진 죄의 흔적으로 남긴 것이다.
21세기 페미니즘의 청사진을 그리다
더 급진적이고 노골적인, 남성을 벗는 여성의 이야기
『진홍글씨』는 페미니즘 소설이자 르포 소설이다. 이윤기 작가는 문화인류학·신화학을 오고가며 우리 일상생활에, 그리고 뇌리에 당연하게 세뇌되어 있던 관행과 전통의 폐부를 서슴없이 꺼낸다. 그 속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불평등과 교묘한 차별은 물론이고, 제도적으로 안착해버린 폭력과 사회화된 악습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이 소설이 다른 페미니즘 소설과 남다른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이유이다. 실제로 작가는 유방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선입견을 제시하는 초반부를 필두로, 삶에 숨어 있는 문화적·신화적 상징들을 분석해나감으로써 이 세계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명료히 까발린다. 나아가 급작스러운 파국을 제시함으로써, 여성에게 유달리 더 섬세하고 사려 깊은 남성조차 기존의 양성 간 불평등한 섹슈얼리티 착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성의 물리적 폭력만 없으면 여성억압이라는 현실이 가려지리라는 허위의식을 꿰뚫고, 문화적·관습적으로 뿌리깊이 자리잡아온 상징들 속에 숨은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