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백야 · 우스운 자의 꿈』이 작가정신 러시아 고전산책 시리즈의 첫 권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이 시리즈는 러시아 문학에 대해 독자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분량이 방대하다거나 내용이 난해하다는 선입견을 걷어내고, 러시아 대문호의 작품 중에서 사색해볼 만한 주제를 가진 중단편을 수록해 산책하듯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에는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거장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인 「백야」와 말기 작품인 「우스운 자의 꿈」이 실려 있다. 이 두 단편은 ‘꿈’이라는 주제어로 엮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그의 문학 인생의 양끝에 위치한 두 작품이 일관되게 ‘인간’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인간다운 삶’의 문제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가 일생 동안 문학을 통해 추구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무려 두 세기의 시간적 간극을 뛰어넘어 인류에게 보편적인 가치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다.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인간의 순수성이나 따뜻한 사랑보다는 치밀하고 계산적인 과학과 합리주의만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런 우리들로 하여금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쯤 생각해보도록 만들고 있다. 꿈과 환상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하는 책 『백야 · 우스운 자의 꿈』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ФёДор М.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심성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심리적 통찰력으로, 특히 영혼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20세기 소설 문학 전반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 그의 장편소설들은 삶의 지혜와 영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데 예술이 매체로 이용된 뛰어난 본보기이며, 그에게 세계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의 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이미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던 그는 1849년에는 출판의 자유, 농노 해방, 사법제도의 개편을 역설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나 4년간의 시베리아 유형으로 감형받았다. 유형생활을 마친 그는 다시 창작에 정열을 쏟아 「스테판치코보 마을」 「학대받고 멸시받는 사람들」 등의 작품을 쏟아냈다. 이후 유럽 여행을 떠난 도스토옙스키는 한때 도박에 빠져 빚에 시달리면서도 계속되는 창작 활동을 통해 「악어」 「도박사」 「영원한 남편」 등을 발표했으며 『백치』 『악령』을 잡지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연재했다. 그는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온순한 여인」을 비롯한 몇 작품들을 모아 『작가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표한다. 「우스운 자의 꿈」은 이듬해에 『작가일기』에 추가되어 발표되었다. 1878년부터 1880년까지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루스키 베스트니크》에 연재한다. 그리고 1881년 1월 28일 고질적인 폐질환이 악화되어 사망하고 유해는 같은 달 31일에 페테르부르크 소재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사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옮긴이 고일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하고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 슬라브어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회상』 『젊은 근위대』 『에로스가 속삭인다』 『결혼』 『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 독본(톨스토이 문학전집)』 『중단편선Ⅲ(톨스토이 문학전집)』이 있다.
백야 007
우스운 자의 꿈 117
역자 후기 – 인간에 대한 연민 161
도스토옙스키 연보 166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받는 데,
자신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힌 이를 용서하기보다는 복수하는 데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도스토옙스키의 전언!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남들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단 하루, 단 한 시간 만에 모든 게 제자리를 찾게 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도스토옙스키가 「백야」와 「우스운 자의 꿈」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그의 창작 초기부터 가난하고 평범한 보편적 민중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하지만 19세기의 시대 흐름은 그의 문학적 관심과 이상의 영역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성이 중시되었으며 과학만능주의가 팽배했다. 그 얘기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인간성 상실’이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로 자리매김되기 시작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백야」와 「우스운 자의 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각각 평범한 19세기 러시아 민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페테르부르크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물리적 배경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과학과 이성만능주의’가 횡행하는 황량한 시대를 대변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그 차갑고 매몰찬 ‘현실적’ 공간 안에 존재하는 두 주인공은 모두 ‘꿈과 환상’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란 바로 ‘사랑’이다. 그것도 현실적 요건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사랑이 아닌 절대불변의 ‘영원성’이 내재된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과 환상’이라는 배경을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삶의 본질이라고 믿는 부분을 단지 ‘꿈’의 영역에 내버려두지 않고 현실로 끌어내린다. 현실적으로 무기력한 한 개인으로서의 주인공들이 ‘꿈’의 영역을 넘나들다 돌아온 페테르부르크는 여전히 차갑고 메마른 공간으로 남아 있지만, 한 가지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꿈꾸는 존재’로 거듭난다는 점이다. 그들의 꿈은 이제 실현 불가능한 몽상으로서의 꿈이 아니라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꾸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의 ‘현실적 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이 현실적으로 ‘변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성 상실’의 현실을 사회적 조류나 타인의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개개인 하나하나가 ‘인간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갈 때 결국 모든 것은 지금과 아주 다르게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런데 그게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라고 외치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가까운 진리를 외면하는 현실에 대한 절규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는 긍정과 희망의 전언이기도 하다.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두 작품을 통해서 황폐하기만 한 절망의 시대에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마음 깊이 새겨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