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제6회 젊은작가상, 제5회 문지문학상, 201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윤이형의 신작소설 『붕대 감기』가 <소설, 향>의 두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리얼리즘과 SF·판타지 등을 오가는 개성적인 서사로 주목받은 윤이형은 2007년 첫 번째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를 펴낸 이래, 세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내는 등 꾸준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소수자의 감각과 서사에 끈기 있게 천착해온 그녀의 작품 세계는 2016년 페미니즘에 대한 각성(“신전들이 무너지고 우상들이 깨져 실려 나간 빈자리에 가치관의 재건작업이 시작되었다”―2019. 9. 19. 《중앙선데이》 작가 인터뷰)을 계기로 더욱 확장되고 구체화되었다. 『붕대 감기』는 이러한 자각과 다짐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로서, ‘우정’이라는 관계 안에서 휘몰아치는 복잡하고 내밀한 감정들을 첨예한 문제의식과 섬세한 문체로 묘파하며 작가가 현재 몰두하는 ‘여성 서사’라는 화두를 가장 적실하게 그려 보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소설에서는 계층, 학력, 나이, 직업 등이 모두 다른 다양한 여성들의 개별적인 서사가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불법촬영 동영상 피해자였던 친구를 보고도 도움을 주지 못했던 미용사 지현, 영화 홍보기획사에 다니는 워킹맘이자 의식불명에 빠진 아들 서균을 둔 은정, 그런 서균과 한반인 딸 율아의 엄마 진경, 진경의 절친한 친구이자 출판기획자인 세연 등 바톤터치를 하듯 연결되는 이들 각자의 사연은 개인의 상처에서 나아가 사각지대에 자리한 우리 사회의 환부에까지 가 닿는다. 그리고 소설은 우리가 모두 아프다는 자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의 고통을 비교하며 위안받는 인물들과 “꿈에도 서로를 사랑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작가의 말」) 인물들의 이어짐을 통해 따듯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_「작가의 말」
윤이형
2005년 「검은 불가사리」로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14년, 2015년 젊은작가상, 2015년 문지문학상, 201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 『러브 레플리카』 『작은마음동호회』, 중편소설 『개인적 기억』, 청소년소설 『졸업』, 로맨스소설 『설랑』 등이 있다.
붕대 감기 7
‘진짜 페미니즘’을 넘어서 | 심진경 171
작가의 말 197
서로의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바톤터치 하듯 이어지는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영화 홍보기획사에서 일하는 은정은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은정은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식한 아이 엄마’로만 남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타인과의 감정 섞인 교류 없이 강퍅하고 완고하게 스스로를 가둬왔다. 그러나 8개월 전 그녀의 고성에도 균열이 가기 시작된다. 아들 서균이 교회 수련회에서 눈썰매를 타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것이다. 8개월이라는 시간은 온화한 성정의 남편을 비롯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주변의 모든 것들을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고, 이제 그녀는 무참한 현실에 맞닥뜨린 자신에게 누구도 안부를 묻지 않는다는 사실에 “초점 없는 혼잣말과 욕설”을 “방언처럼 줄줄” 내뱉는다.
“하지만 누구라도, 누구 한 아이의 엄마라도, 인사치레로라도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많이 힘드시지요? 서균이는 좀 어떤가요? 하고 말을 걸어준다면 좋을 텐데. 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_본문 23쪽
그러나 은정이 눈치채지 못한 따스한 응원과 위안의 기미가, 실은 존재했다. 그가 다니는 미용실의 헤어 디자이너인 두 사람. 미용실 실장인 해미는 “지독하게 말수가 없”고, “언제나 온몸과 마음이 잔뜩 긴장”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은정에게, 자신의 ‘인생 책’인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선물하고는 8개월 전 마지막 염색 이후로 발길을 끊은 그녀를 걱정한다. 같은 미용실의 지현 또한 내내 마음이 무겁다. 8개월 전, 지현은 은정의 아이 서균이 너무 얄미웠다. 미용실 안을 헤집고 난리를 피우는데도 엄마는 피로한 표정으로 아이를 말리는 시늉만 할 뿐이었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 엉덩이를 때렸을 땐 염색약을 엎지른 후였다. 은정은 그 순간 트위터 앱을 켜고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은 상태”로 ‘속이 터진다 ㅅㅂㅅㅂ’ 같은 글을 썼고,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전해 듣고 죄책감에 빠진 것이다. 은정의 죄책감은 사실 그보다 더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대학 동기 미진이 불법촬영 동영상의 피해자였는데, 지현은 친구의 불행을 위로하다 그녀가 감당하고 있는 정신적 무게가 버거워 그만 손을 놓아버렸다. 그녀는 친구 미진과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악의적인 감정을 품었던 아이 서균의 안위와 평안을 간절하게 빌어본다.
‘우정’에 바라는 기대와 허상, 실망과 환멸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해가려는 마음
이어 서균과 한반인 딸 율아를 둔 진경과, 그의 친구인 세연의 사연이 시작된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단짝이었던 진경과 세연은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해서도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다. 진경이 직장에 들어가면서 연락이 끊어졌지만, 진경은 아이 엄마이자 방과후독서 지도교사가, 세연은 출판기획자가 되어 페이스북에서 다시 만난다. 처음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 특별했다. 교련 시간에 2인 1조로 붕대 감기 실기시험을 치르다 세연이 실수로 진경의 머리를 잡아당기면서였는데 두 사람에게 친해질 만한 공통분모라곤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아이” 진경과 “고립된 문제아” 세연은 서로가 간절히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래도록 곁을 지켜주었다.
둘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네트워크로 언제나 이어져 있었고, 서로에게 가장 먼저 댓글을 달아주는 사이였다. 서로가 지닌 빛에, 어둠에, 즐거움에, 슬픔에, 한심함에._본문 60쪽
하지만 3년 전쯤부터 세연은 점차 진경과 멀어진다. 세연은 더 이상 페이스북에 일상 포스팅을 하지 않았고, 글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도 극히 드물었을 뿐 아니라 진경이 셀피를 올리면 ‘좋아요’만 누를 뿐 댓글은 달지 않는다. 세연은 짧고 정확한 성격의 글만 적어 올린다. 자신이 현재 기획하고 있는 책이나 앞으로 나올 책의 출간 소식 또는 여성주의 관련 글과 이슈들에 대해서만. 그들은 어디서부터 이렇게 멀어진 걸까. 그리고 그렇게 멀어진 뒤에도 왜 계속 서로의 움직임에, 마음 상태에, 변화에 신경이 곤두서는 것일까.
“너는 나를 알고 싶은 거였구나!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서로 기대고, 덧대어지고, 때론 교차하면서 펼치는
아름답고 정교한 태피스트리
이처럼 『붕대 감기』는 친구에게 거는 기대와 허상, 그 허상이 깨졌을 때의 실망과 환멸, 그리고 이를 다시 회복해가려는 마음과 미묘한 갈등을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핍진한 현실 위에서 펼쳐 보인다. 그것은 “가정과 직장이라는 제한된 공간 밖에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새로운 친밀감의 영역”이자 “순수하게 관계 내적인 속성에 따라 형성되고 지속되는”(심진경, 「작품 해설」) 관계다.
동료이거나 동지이거나 친구인, 이해관계 너머에 있는 ‘순수한’ 관계들의 유형은 진경과 세연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다른 인물들의 사연을 통해 제시된다. 세연이 ‘여성들의 우정’이라는 출간물을 기획하며 취재를 요청한 대학 교수 경혜는 제자에게 ‘페미니스트 투사’라는 영광을 얻으려는 ‘꼰대’로 비춰진다. 채이는 경혜에게 친구가 되자고 먼저 손을 내민 당찬 학생이었지만, A교수의 추행 사실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쓴 뒤 보복을 당할까 두려움에 떤다. 그리고 그런 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친구 형은, 형은의 엄마인 명옥, 그녀의 동반자인 효령까지 많은 인물들의 사연은 서로 기대고, 간극을 벌렸다가, 다시금 교차하면서 태피스트리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게 직조되어 간다.
여성이 겪는 현실적인 문제들, 즉 가부장제,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미러링, 탈코르셋 등 페미니즘 이슈는 물론, 우리 사회를 둘러싼 온갖 억압과 폭력의 문제들은 자연스레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나이 많은, 나이 어린, 대학교수인, 고등학생인, 워킹맘인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어떤 연유로 서로 멀어지고 또 그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혹은 극복이 안 되었는지”, 그리고 관계의 속성과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반추하게 만든다. 소설에 따르면 이들은 저마다 삶의 무게와 피로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같은 버스”를 탄 사람들이다. 운전자는 수시로 바뀌지만 버스에 탄 일원들은 버스가 잘 운행되도록 독려와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경쟁자이자 적이 아니다. “돌려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도 않고” 열심히 책을 소개하고 빌려주면서 함께 읽거나, “오직 서로에게만 지어 보일 수 있던” 미소를 지닌 존재, 즉 친구인 것이다.
우정의 전제 조건은 같아지는 게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작가는 “여성들이 같이 억압받고 있는데도 동지로 보기보다는 서로의 고통과 억압을 비교”하는데 우리가 “서로 미워할 필요가 없고 힘을 합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2019.01.22. 《경향신문》 인터뷰) 소설 속에도 등장하는 ‘친구’라는 이름의 전통춤처럼, 때론 앞 사람의 등만 보는 춤을 주게 될지라도, 그가 준비가 될 때까지 단절의 휴지를 감내하고 기다려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라는 진단은(심진경, 「작품 해설」) 의미심장하다.
이야기의 릴레이는 소설이 끝나고 난 뒤에도 독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환한 빛을 비추며 다시금 말을 걸어올 것이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존재가 어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그것만으로도 삶은 앞으로 나아가볼 만한 것이라고 작가가 힘주어 이야기하는 이유다.
작가정신 <소설, 향>
소설, 향香을 담다 : 소설, 반향響을 일으키다 : 소설, 향向하다
작가정신 〈소설, 향〉은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소설향’을 리뉴얼해 선보이는 중편소설 시리즈로, “소설의 본향, 소설의 영향, 소설의 방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 ‘향’이 가진 다양한 의미처럼 소설 한 편 한 편이 누군가에는 즐거움이자 위로로, 때로는 성찰이자 반성으로 서술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